brunch

욕망을 쫓는 물고기들: 불교로 보는 문학의 풍경

제3부 해외문학과 욕망의 보편성

by 한시을

18회: 법의 괴로움 –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며 살고 있나요?


합격 통지서를 기다립니다. 월급날을 기다립니다. 주말을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기다림.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만약, 기다리는 '그것'이 영원히 오지 않는다면? 누군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50년 동안 기다린다면? 그래도 계속 기다려야 할까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 아일랜드/프랑스)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바로 이 '법(法)'의 이야기입니다. 법. 우리가 믿는 것, 의미, 목적, 희망. 하지만 그것이 실체가 없다면? 부조리하다면? 그래도 믿어야 할까요?


1950년대, 시골길 한 그루 나무 아래


하늘 (시대정신, 질서)

1950년대 전후 유럽.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세상은 폐허였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의미도, 목적도, 희망도.


무대는 텅 비어 있습니다. 시골길. 앙상한 나무 한 그루. 그게 전부입니다.


하늘이 던진 먹이는 무엇이었을까요? 부재(不在)였습니다. 신도, 의미도, 구원도 없는 세상. 부조리(不條理)한 세상.


하늘이 던진 먹이: 법(구원의 약속) - "고도가 올 것이다. 기다려라."


먹이 (욕망의 대상)

Primary 먹이: 법(法) - 의미, 목적, 구원 (고도)

Secondary 먹이: 향(香) -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무엇을 원했을까요?


표면적으로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50년 가까이. 매일.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의미였습니다.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삶의 목적. 구원.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에스트라공(고고):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이것이 《고도를 기다리며》의 첫 대사입니다. 그리고 이 대사는 극 전체를 관통합니다.


"Nothing to be done."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에스트라공은 신발을 벗으려고 합니다. 발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발이 잘 벗겨지지 않습니다.

"되는 게 하나도 없네."


블라디미르가 옆에 서 있습니다. 그는 모자를 벗었다 썼다를 반복합니다. 왜? 할 일이 없으니까.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야. 그리고 우리는 그 대답을 알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축복을 받은 거야. 이 무서운 혼란 가운데서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네. 우리는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블라디미르의 대사입니다. 그들에게 확실한 것은 단 하나.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고도는 누구인가?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고도(Godot)는 누구일까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모릅니다. 고도가 누군지, 어떻게 생겼는지, 언제 오기로 했는지, 왜 기다리는지.

하지만 기다립니다. 50년 가까이.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블라디미르: 기다리는 거야 버릇이 돼 있으니까.


"습관은 우리의 모든 이성을 무디게 하지."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이제 왜 기다리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냥 기다립니다.


고도는 신(God)일까요? 구세주일까요? 희망일까요? 의미일까요?


베케트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내가 알았으면 작품에 썼을 것이다."


고도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각자가 상상하는 그 무엇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지만 결코 오지 않는 그것.


물고기 (인간)


블라디미르(디디, Vladimir): 이성적, 철학적, 희망을 붙잡으려는 자. "고도를 기다려야 해"라고 반복하는 사람


에스트라공(고고, Estragon): 감각적, 육체적, 절망하는 자. 매일 고도를 잊어버리고 "떠나자"고 말하는 사람


포조(Pozzo): 독재자, 럭키를 노예처럼 부리는 지주. 1막에서는 눈이 멀쩡했지만 2막에서는 장님


럭키(Lucky): 노예, 포조에게 끌려다니는 존재. 1막에서는 말을 했지만 2막에서는 벙어리


소년: 고도의 전령. 매일 저녁 나타나 "고도씨가 오늘은 못 오고 내일은 꼭 온다"고 전하는 아이


반복: 1막과 2막


《고도를 기다리며》는 2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막: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나무 아래서 고도를 기다림 → 포조와 럭키 등장 → 소년이 와서 "고도가 내일 온다"고 전함 → 목을 매려다 실패 → 내일 다시 오기로 함


2막: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나무 아래서 고도를 기다림 → 포조(장님)와 럭키(벙어리) 등장 → 소년이 와서 "고도가 내일 온다"고 전함 → 목을 매려다 실패 → 내일 다시 오기로 함


똑같습니다.


1막과 2막이 거의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단 하나 다른 것은 나무에 잎이 조금 자랐다는 것. 그리고 포조는 장님이 되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었다는 것.


시간은 흘렀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아무도 안 오고 아무도 안 떠나고 참 지겹군."


에스트라공의 대사입니다. 이것이 《고도를 기다리며》의 본질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극.


괴로움의 구조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의(意)가 추구한 것


"고도. 그가 오면 우리는 구원받을 것이다. 삶에 의미가 생길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의(意)가 추구한 법(法)이었습니다. 구원, 의미, 목적.


하지만 하늘이 던진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부재였습니다. 고도는 오지 않았습니다.


불일치 → 기다림 → 반복 → 절망 → 그래도 기다림


구부득고(求不得苦) -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원한 것은 고도, 즉 구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도는 오지 않았습니다. 50년 동안.


소년이 매일 전합니다. "고도씨가 오늘은 못 오고 내일은 꼭 온다고 하셨습니다."


"내일"은 영원히 오지 않는 내일입니다. 고도는 영원히 "내일" 올 것입니다. 즉,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이것이 구부득고입니다.


원증회고(怨憎會苦) - 미워하는 것을 마주해야 하는 괴로움


에스트라공은 매일 밤 누군가에게 맞고 옵니다. 누구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매일 맞습니다.


블라디미르는 방광에 문제가 있어 자주 소변을 봅니다. 괴롭습니다.


그들은 자살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 당 목이나 매자." 하지만 허리끈이 끊어져서 실패합니다.


매일 같은 괴로움을 마주합니다. 변하지 않는 고통. 이것이 원증회고입니다.


오음성고(五陰盛苦) - 존재 자체의 괴로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왜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에스트라공: 우리 떠나자.
블라디미르: 못 떠나.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아, 맞다.


이 대화가 극 내내 반복됩니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습니다. 고도를 기다려야 하니까. 왜? 그냥. 습관이니까.


존재 자체가 괴로움입니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이것이 오음성고입니다.


부조리극: 의미 없는 대화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Theatre of the Absurd)입니다.


부조리극의 특징은 논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명확한 시작도, 전개도, 결말도 없습니다.


대화를 봅시다.


에스트라공: 밤이 오고 있어.
블라디미르: 그럼 일어서야지.
에스트라공: (일어나려 하지 않으며) 그래, 가자.
블라디미르: 가자.
(두 사람 움직이지 않음)


"가자"고 말하지만 가지 않습니다. 왜? 부조리하니까.


또 다른 대화:


에스트라공: 제 발이 잘못됐는데도 구두 탓만 하니 그게 바로 인간인 거지.


이 대사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뭔가 진리 같습니다. 이것이 부조리극입니다.


베케트가 본 세상은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들로 가득 찬 세계였습니다. 언어는 소통되지 않고, 시간은 흐르지 않으며, 의미는 없습니다.


그래서 베케트는 기존 언어를 해체했습니다. 비논리적 대화, 욕설, 침묵. 관객은 낯설어합니다. "이게 뭐야?"


하지만 바로 그것입니다. 낯설음. 이해할 수 없음. 그것이 현대 인간의 삶입니다.


목을 매다: 자살 시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합니다.


에스트라공: 우리 당 목이나 매자.
블라디미르: 뭘로?
에스트라공: 네 허리끈 없어?
블라디미르: 나 허리끈 없어.
에스트라공: 그럼 내 걸로.


에스트라공의 허리끈으로 목을 매려고 합니다. 하지만 허리끈을 잡아당기자 끊어집니다.


실패.


블라디미르: 내일은 꼭 튼튼한 밧줄을 가져오자.


자살조차 실패합니다. 왜? 부조리하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고 싶지만 죽지 못합니다. 왜?


고도를 기다려야 하니까.


고도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그들이 사는 이유입니다. 유일한 이유입니다.


만약 고도를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진짜로 죽을 것입니다. 이유 없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으니까.


하지만 고도라는 희망(?)이 있기에, 그들은 삽니다. 비참하게. 무의미하게. 하지만 삽니다.


불교적 통찰: 법의 부재


무상(無常): 의미도 변한다


불교에서 무상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1막에서 2막으로 가면서 나무에 잎이 자랐습니다. 포조는 장님이 되었습니다. 럭키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여전히 고도를 기다립니다.

50년 전처럼. 어제처럼. 오늘처럼.


변하는 것(잎, 장님, 벙어리)은 표면적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기다림)이 본질입니다.


역설입니다. 무상(모든 것은 변한다)이지만, 동시에 영원한 반복입니다.


집착: 고도에 대한 집착


블라디미르의 집착은 "고도는 올 것이다"라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이 무서운 혼란 가운데서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네."


고도에 대한 집착이 그를 살게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고통스럽게 합니다.


만약 고도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면? 에스트라공처럼 "우리 떠나자"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블라디미르는 버리지 못합니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집착이 괴로움을 만듭니다. 하지만 집착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색성향미촉법의 관점


하늘이 던진 것: 전후 유럽 - 부재, 부조리, 의미 없는 세상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추구한 것: 법(고도, 구원, 의미)


불일치 → 기다림 → 반복 → 절망 → 그래도 기다림


Primary 욕망은 법(法)이었습니다. 고도. 구원. 의미. Secondary 욕망은 향(香)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지만 법은 부재했습니다. 고도는 오지 않았습니다. 의미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부조리입니다. 원하는 것(법)과 현실(부재)의 불일치.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


사무엘 베케트는 196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왜?


《고도를 기다리며》는 1953년 파리 바빌론 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혹평이 쏟아졌습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이게 연극인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캘리포니아 샌퀸틴 교도소에서 이 연극을 상영했을 때, 죄수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그들은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죄수들은 매일 감옥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냅니다. 언제 나갈지 모릅니다. 어쩌면 영원히 못 나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다립니다. "언젠가는 나갈 수 있을 거야"라고.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과 똑같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위대한 이유는 보편성 때문입니다.


1950년대 유럽 부랑자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2025년 서울 직장인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승진을, 결혼을, 성공을, 행복을.


하지만 그것이 정말 올까요? 온다고 해도, 온 후에는? 또 다른 것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영원한 기다림입니다. 그리고 베케트는 그것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보여줬습니다.


[작품 정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두 부랑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누군지도 모르는 '고도'를 50년 가까이 기다리지만 고도는 영원히 오지 않고, 그들은 자살조차 실패하며 내일도 또 기다리기로 하는 이야기이며, 법(의미, 목적, 구원)이 부재한 부조리한 세상에서 그래도 살아가는 인간의 보편적 모습을 증명한다.


우리는 여전히 고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025년 현재,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월급날을 기다립니다. 주말을 기다립니다. 승진을 기다립니다. 결혼을 기다립니다. 아이가 크기를 기다립니다. 은퇴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는? 죽음을 기다립니다.


"에스트라공: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블라디미르: 기다리는 거야 버릇이 돼 있으니까."


기다림은 습관이 되었습니다. 왜 기다리는지조차 모르고 기다립니다.


블라디미르처럼 "고도를 기다려야 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에스트라공처럼 "우리 떠나자"고 절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둘 다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나무 아래.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베케트는 "고도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작품에 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고도를 정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질문해야 합니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 올까?"
"오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50년을 기다렸습니다. 고도는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았습니다. 비참하게, 무의미하게, 하지만 살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답일지도 모릅니다. 기다림 그 자체가 삶이라는 것.


고도가 오건 안 오건, 우리는 살아갑니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내일은 꼭 튼튼한 밧줄을 가져오자."


자살조차 내일로 미룹니다. 왜? 내일은 고도가 올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 "내일"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다음 회 예고] 제4부 19회: "욕망의 불일치 – 왜 괴로움은 반복되는가" - 이제 우리는 제3부를 마치고 제4부로 들어갑니다. 색성향미촉법, 여섯 가지 욕망을 모두 살펴봤습니다. 《설국》의 색,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성, 《백 년 동안의 고독》의 향, 《빌러비드》의 미, 《19호실로 가다》의 촉, 《고도를 기다리며》의 법. 모두 다른 욕망이었지만,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 왜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요? 왜 괴로움은 반복될까요? 제4부에서는 불교와 문학의 본질을 깊이 파고듭니다. 일체개고, 무상, 공. 그리고 문학이 영원한 이유.

keyword
수, 금 연재
이전 18화욕망을 쫓는 물고기들: 불교로 보는 문학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