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문학과 불교의 해제
잠깐,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는 지금까지 12편의 작품을 봤습니다. 《춘향전》부터 《고도를 기다리며》까지. 500년, 5개 대륙, 12명의 작가, 12개의 이야기.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모두 같은 구조였습니다.
조선시대 기생의 딸 춘향도, 일본 온천 마을의 게이샤 고마코도, 소련 전쟁터의 여성 병사들도, 미국 흑인 노예 세도(Sethe)도, 1960년대 영국 주부 수잔도, 부조리한 세상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도.
모두 괴로워했습니다.
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이것이 일체개고(一切皆苦), 부처님이 2,500년 전에 발견한 진리입니다. 모든 존재는 괴로움이라는 것.
그런데 왜 괴로움은 반복될까요? 500년이 지나도, 지구 반대편에서도, 왜 같은 고통이 반복될까요?
한국 문학 6편을 봤습니다.
제2부: 한국문학 – 하늘의 변화
《춘향전》: 신분제 아래 정의(법)를 추구한 춘향
《만세전》: 식민지배 아래 저항(법)을 택한 이인화
《광장》: 분단 아래 제3의 길(법)을 찾던 명호
《소년이 온다》: 독재 아래 민주주의(법)를 위해 싸운 동호
《도가니》: 자본주의 아래 정의(법)를 외친 강인호
《82년생 김지영》: 신자유주의 아래 정체성(향)을 잃어버린 김지영
해외 문학 6편을 봤습니다.
제3부: 해외문학 – 욕망의 보편성
《설국》: 순수한 아름다움(색)을 소유하려던 시마무라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전쟁의 소리(성)에 짓눌린 여성들
《백 년 동안의 고독》: 가문의 정체성(향)에 갇힌 부엔디아 가문
《빌러비드》: 자유의 맛(미)을 얻지 못한 세 도 씨
《19호실로 가다》: 혼자 있을 공간(촉)을 원한 수잔
《고도를 기다리며》: 의미(법)를 찾지 못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12편. 모두 다릅니다. 시대도, 장소도, 인물도, 상황도 다릅니다.
하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원하는 것(욕망)과 현실(먹이)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괴로워했습니다.
부처님은 인간의 욕망을 여섯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색(色) - 시각: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다
성(聲) - 청각: 듣고 싶은 소리가 있다
향(香) - 후각: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
미(味) - 미각: 맛있는 것, 좋은 것을 먹고 싶다
촉(觸) - 촉각: 만지고 싶다, 접촉하고 싶다
법(法) - 의식: 옳은 것, 의미 있는 것을 추구하고 싶다
이 여섯 가지가 인간의 모든 욕망입니다. 2,500년 전에나 지금이나,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똑같습니다.
우리가 본 12편의 작품을 다시 봅시다.
색(色)의 괴로움 - 《설국》
시마무라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었습니다. 고마코의 아름다움을, 눈 덮인 풍경의 순수함을. 하지만 아름다움은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소유하려는 순간 사라져 버렸습니다.
성(聲)의 괴로움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소련 여성 병사들은 전쟁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폭탄, 총소리, 비명. 하지만 그들이 진짜 듣고 싶었던 것은 평화의 소리, 인정받는 소리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향(香)의 괴로움 - 《백 년 동안의 고독》
부엔디아 가문은 100년 동안 "우리는 누구인가?"를 물었습니다. 가문의 정체성, 개인의 정체성. 하지만 답은 없었습니다. 마지막 아우렐리아노가 양피지를 다 읽는 순간, 가문은 바람에 사라졌습니다.
미(味)의 괴로움 - 《빌러비드》
세도 씨는 자유의 맛을 원했습니다. 노예가 아닌 인간으로 사는 것. 하지만 노예제가 끝난 후에도 자유는 달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유령 빌러비드가 계속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촉(觸)의 괴로움 - 《19호실로 가다》
수잔은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촉(접촉)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남편, 아이들, 모든 사람들의 손길로부터. 하지만 19호실조차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가스 자살로 완벽한 고독을 선택했습니다.
법(法)의 괴로움 - 한국문학 6편 + 《고도를 기다리며》
춘향, 이인화, 명호, 동호, 강인호는 모두 '법'을 추구했습니다. 정의, 저항, 민주주의, 옳은 것. 하지만 하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의미)를 50년 동안 기다렸지만, 고도는 오지 않았습니다.
같은 구조가 보이나요?
원하는 것 ≠ 얻은 것
욕망 ≠ 현실
이것이 괴로움의 본질입니다.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는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첫째: 아예 얻지 못함
춘향은 정의를 원했지만, 변학도는 그녀를 죽이려 했습니다.
동호는 민주주의를 원했지만, 계엄군은 총을 쏘았습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기다렸지만, 고도는 오지 않았습니다.
구부득고(求不得苦) -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둘째: 얻었지만 기대와 다름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얻었지만, 그녀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현실의 무게를 진 여자였습니다.
세 도 씨는 자유를 얻었지만,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명호는 남한도, 북한도 선택했지만, 둘 다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원증회고(怨憎會苦) - 미워하는 것을 마주해야 하는 괴로움.
셋째: 얻었는데도 만족하지 못함
김지영은 대학도 나오고, 취업도 하고, 결혼도 했습니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왜?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정체성(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부엔디아 가문은 100년 동안 번성했습니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왜? 가문의 저주, 반복되는 고독 때문입니다.
오음성고(五陰盛苦) - 몸과 마음이 변하는 괴로움, 존재 자체의 괴로움.
하늘-먹이-물고기 구조
우리의 프레임워크를 다시 봅시다.
하늘이 먹이를 던집니다.
물고기는 그 먹이를 쫓습니다.
하지만 물고기의 의(意, 뜻/신념/의지)가 추구하는 것과 하늘이 던진 먹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불일치 → 괴로움 → 펄떡임 → 문학
《춘향전》
하늘: 조선 신분제
하늘이 던진 먹이: 기생의 딸은 양반에게 순응하라
춘향의 의가 추구한 것: 정의, 자유로운 사랑
불일치 → 옥에 갇힘 → 펄떡임
《소년이 온다》
하늘: 전두환 독재
하늘이 던진 먹이: 3S(색성향미촉) + 체제인정(법)
동호의 의가 추구한 신념: 민주주의
불일치 → 총에 맞아 죽음 → 펄떡임
《설국》
하늘: 1930년대 일본
하늘이 던진 먹이: 온천 마을의 게이샤
시마무라의 의가 추구한 것: 순수한 아름다움(색)
불일치 → 환상 깨짐 → 펄떡임
《고도를 기다리며》
하늘: 전후 유럽, 부조리
하늘이 던진 먹이: 부재, 무의미
블라디미르의 의가 추구한 것: 고도(의미, 법)
불일치 → 영원한 기다림 → 펄떡임
모든 작품이 같은 구조입니다.
하늘이 던진 것 ≠ 물고기가 원한 것
이 불일치가 괴로움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 괴로움이 문학을 만듭니다.
왜 욕망과 현실은 절대 일치하지 않을까요?
첫째: 하늘은 자신을 유지하려 한다
하늘(권력, 시스템, 시대정신)은 자신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순응하는 먹이를 던지고, 저항하는 먹이를 금지합니다.
조선은 신분제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춘향의 정의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전두환은 독재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동호의 민주주의를 총으로 막았습니다.
자본주의는 자신을 유지하려 합니다. 그래서 강인호의 정의를 돈으로 막았습니다.
하늘은 자신과 다른 욕망을 가진 물고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불일치는 필연입니다.
둘째: 욕망은 끝이 없다
인간의 욕망은 하나를 채우면 또 다른 것이 생깁니다.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얻었지만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왜? 순수한 아름다움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지영은 대학도, 직장도, 결혼도 얻었지만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왜?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50년을 기다렸지만 여전히 기다립니다. 왜? 고도는 영원히 "내일"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통찰입니다.
셋째: 무상(無常) - 모든 것은 변한다
설령 욕망과 현실이 일치한다 해도,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춘향과 몽룡이 결혼했습니다. 해피엔딩입니다. 하지만 그 행복도 무상합니다. 언젠가는 끝납니다.
김지영이 정체성을 찾았다 해도, 그것도 변할 것입니다. 왜? 모든 것은 변하니까.
무상(無常): 하늘도 변하고, 먹이도 변하고, 물고기도 변합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욕망의 구조는 변하지 않습니다. 색성향미촉법, 여섯 가지 욕망은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은 반복됩니다.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더 괴로워하고, 어떤 사람은 덜 괴로워할까요?
집착(執着) 때문입니다.
춘향은 정의에 집착했습니다. "죽어도 변학도의 수청을 들지 않겠다." 이 집착이 그녀를 죽음 앞까지 몰고 갔습니다. 하지만 이 집착이 없었다면, 《춘향전》도 없었을 것입니다.
동호는 도청에 집착했습니다.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도망칠 수 있었지만 남았습니다. 이 집착이 그를 죽였습니다. 하지만 이 집착이 없었다면, 광주는 기억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마무라는 순수한 아름다움에 집착했습니다. 현실의 고마코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 집착이 그를 공허하게 만들었습니다.
수잔은 19호실에 집착했습니다. "이곳만은 나만의 공간이어야 한다." 이 집착이 그녀를 자살로 몰고 갔습니다.
집착은 괴로움을 키웁니다. 부처님은 집착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집착을 버리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까요? 문학은 무엇을 기록할까요?
역설입니다.
집착이 괴로움을 만듭니다.
하지만 집착이 없으면 문학도 없습니다.
집착이 없으면 변화도 없습니다.
춘향이 정의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변학도의 수청을 들었을 것입니다. 조선의 신분제는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동호가 민주주의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도망갔을 것입니다. 광주는 잊혀졌을 것입니다.
집착은 양날의 검입니다.
괴로움을 만들지만, 동시에 변화를 만듭니다.
고통을 만들지만, 동시에 의미를 만듭니다.
문학은 무엇을 기록할까요?
성공한 물고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행복한 물고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문학은 펄떡이는 물고기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는 물고기.
얻었지만 기대와 달라 괴로워하는 물고기.
얻었는데도 만족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물고기.
춘향은 정의를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펄떡였습니다.
동호는 민주주의를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하지만 펄떡였습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기다립니다. 여전히 펄떡입니다.
이 펄떡임이 문학입니다.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에서 오는 괴로움.
그 괴로움을 견디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포기하지 않고 계속 펄떡이는 물고기의 이야기.
이것이 일체개고(一切皆苦)의 문학적 증명입니다.
이제 우리는 대답할 수 있습니다.
왜 괴로움은 반복되는가?
첫째, 하늘은 계속 변하지만 본질은 같기 때문입니다.
조선 → 식민 → 분단 → 독재 → 자본 → 신자유
하늘은 변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하늘은 물고기에게 순응을 강요했습니다. 형태는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습니다.
둘째, 물고기의 욕망 구조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색성향미촉법. 여섯 가지 욕망은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조선시대 춘향도, 2016년 김지영도, 같은 욕망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형태는 달랐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셋째, 욕망은 결코 완전히 충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늘의 만족은 내일의 불만이 됩니다.
끝없는 욕망의 연쇄가 계속됩니다.
그래서 괴로움은 반복됩니다.
500년 전에도, 지금도, 500년 후에도.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이것이 일체개고입니다.
모든 존재는 괴로움입니다.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는 피할 수 없습니다.
절망적인 결론처럼 들립니다. 괴로움은 피할 수 없다니. 하지만 부처님은 절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첫째, 괴로움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 자체가 해방의 시작입니다.
춘향이 왜 괴로웠는지 우리는 압니다. 신분제와 정의의 불일치 때문입니다.
김지영이 왜 괴로웠는지 우리는 압니다. 사회가 강요하는 역할과 자신의 정체성의 불일치 때문입니다.
이해하면, 덜 괴롭습니다. 왜? 내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둘째, 괴로움을 공유하면 덜 외롭습니다.
문학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만 괴로운 게 아니야. 500년 전 춘향도, 지구 반대편 수잔도, 모두 너처럼 괴로워했어."
이것이 문학의 위로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셋째, 펄떡임 자체가 의미입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50년을 기다렸지만 고도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50년은 무의미했을까요?
아닙니다. 기다림 자체가 삶이었습니다. 고도가 오건 안 오건, 그들은 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욕망이 충족되건 안 되건, 우리는 펄떡입니다. 이 펄떡임 자체가 삶입니다.
이제 우리는 왜 문학이 영원한지 압니다.
하늘은 변합니다. 조선도, 일제도, 독재도 무너졌습니다.
먹이도 변합니다. 과거 급제는 이제 아무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괴로움의 구조는 변하지 않습니다.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는 영원합니다.
색성향미촉법, 여섯 가지 욕망은 영원합니다.
펄떡이는 물고기는 영원합니다.
그래서 500년 전 춘향의 이야기가 지금도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일본 시마무라의 이야기가 한국 독자에게도 와닿습니다.
그래서 유럽 블라디미르의 이야기가 세계인에게 공감을 얻습니다.
문학은 이 영원한 괴로움을 기록합니다.
문학은 이 영원한 펄떡임을 증명합니다.
문학은 이 영원한 인간성을 노래합니다.
이것이 문학이 영원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괴로움의 구조를 이해했습니다.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 이것이 반복되는 이유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깊이 들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상(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입니다.
하늘도 변하고, 먹이도 변하고, 물고기도 변합니다.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변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무너질 하늘을 위해 싸우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사라질 먹이를 쫓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다음 회에서는 무상(無常)을 깊이 들여다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라는 역설을 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금 여러분을 괴롭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인가요, 얻었지만 기대와 달라서인가요, 아니면 얻었는데도 만족하지 못해서인가요? 그리고 그 괴로움이 춘향이나 김지영이나 블라디미르의 괴로움과 같은 구조라는 것을 느끼시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다음 회 예고] 제4부 20회: "무상 – 변하지 않는 건 변한다는 사실뿐" - 조선의 하늘도 무너졌고, 독재의 하늘도 무너졌습니다. 춘향의 신분제도 사라졌고, 동호가 싸운 전두환도 감옥에 갔습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렇다면 변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무상(無常)의 진리를 통해 문학이 말하는 것을 봅니다. 변하지만 영원한 것, 사라지지만 남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