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해외문학과 욕망의 보편성
레스토랑에서 메뉴판을 펼칩니다.
파스타, 스테이크, 해산물 리조또...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고민됩니다. "오늘은 뭘 먹지?" 친구와 상의하고, 리뷰를 검색하고, 사진을 보고, 결정합니다. 음식이 나오면 사진을 찍고, 한 입 먹으며 "맛있다" 혹은 "별로다"라고 평가합니다.
당연한 일상입니다. 우리는 매일 무엇을 먹을지 선택합니다.
그런데 만약 평생 단 한 번도 무엇을 먹을지 선택할 수 없다면? 주인이 주는 것만 먹어야 한다면? 맛있든 맛없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냥 먹어야만 한다면?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1993년 노벨문학상 수상, 미국)의 《빌러비드》는 바로 이 '맛(味)'의 이야기입니다. 노예제 아래에서 음식을 선택할 권리조차 빼앗긴 사람들, 그들의 괴로움은 단순히 배고픔이 아니었습니다. 인간다운 삶 자체를 빼앗긴 것이었습니다.
하늘 (시대정신, 질서)
1850년대 미국. 남북전쟁 직전의 시대입니다. 북부에서는 노예제 폐지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남부에서는 여전히 흑인들이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하늘은 명확했습니다. 백인 주인들이 던지는 먹이: "일해라. 복종해라. 주인이 주는 것을 먹어라."
도망친 노예를 잡아오는 "도망 노예법"까지 있었습니다. 심지어 북부로 도망가도 다시 잡혀올 수 있었습니다.
먹이 (욕망의 대상)
Primary 먹이: 미(味) -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권리, 주체적인 삶
Secondary 먹이: 법(法) - 자유, 인간으로서의 존엄
세서(Sethe)가 쫓은 먹이는 무엇이었을까요?
표면적으로는 자유였습니다. 스위트홈 농장에서 도망쳐 오하이오로 갔습니다. 하지만 더 깊은 욕망은 미(味)였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 자식들이 먹을 것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노예는 주인이 주는 것만 먹습니다. 언제 먹을지, 무엇을 먹을지, 얼마나 먹을지 모두 주인이 결정합니다. 음식 선택권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맛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삶을 내가 결정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빌러비드》에는 직접적인 음식 묘사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노예의 삶에서 음식은 기록할 가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스위트홈 농장의 먹이
세서는 스위트홈 농장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농장 주인 가너 씨는 "좋은" 주인이라고 불렸습니다. 노예들을 심하게 때리지 않았고, 총을 들고 다니는 것도 허락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가너 씨의 '허락'이었습니다. 노예들이 무엇을 먹을지도 가너 씨가 정했습니다. 농장에서 생산된 옥수수, 돼지고기, 약간의 채소. 배고프지 않을 만큼만 주어졌습니다. 일할 수 있을 만큼만.
가너 씨가 죽고 학교 선생이 새 주인이 되었을 때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학교 선생은 세서를 동물처럼 관찰했습니다. 그의 조카들은 세서의 젖을 빼앗아 마셨습니다. 세서가 임신 중이었는데도.
이것이 노예의 먹이였습니다. 인간이 아니라 짐승에게 주는 먹이.
124번지의 음식
1873년, 오하이오 신시내티. 세서는 124번지라는 집에서 막내딸 덴버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자유의 몸이 된 세서는 이제 무엇을 먹을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거의 먹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죽은 딸 빌러비드의 유령이 집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서는 18년 전, 도망 노예 사냥꾼들이 자신을 잡으러 왔을 때 두 살배기 딸의 목을 톱으로 베었습니다. 딸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죽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세서는 제대로 살아 있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죄책감에 갇혀 있었습니다.
빌러비드가 먹는 방식
어느 날, 이상한 젊은 여자가 124번지에 나타납니다. 자신을 "빌러비드"라고 부릅니다. 세서가 죽인 딸의 이름과 똑같습니다.
빌러비드는 끊임없이 먹습니다. 탐욕스럽게, 만족을 모르고. 세서는 빌러비드에게 온갖 음식을 해줍니다. 죄책감 때문입니다. 딸에게 미안해서, 보상하고 싶어서.
"그녀는 거의 먹지 않는 반면 빌러비드는 점점 더 커져 결국 임산부의 형태를 취한다."
역설적입니다. 세서는 자신이 먹을 것을 빌러비드에게 다 줍니다. 세서는 말라가고, 빌러비드는 살찌워집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노예제의 상처가 세서를 집어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빌러비드는 단순한 유령이 아닙니다. 노예선에서 죽은 6천만 흑인의 원혼입니다. 그들의 한과 괴로움이 빌러비드라는 형태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세서(Sethe): 도망친 여성 노예, 자식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죽이기로 결심한 어머니
빌러비드(Beloved): 세서가 죽인 두 살배기 딸이자, 노예제로 죽은 모든 흑인의 원혼
덴버(Denver): 세서의 막내딸, 18세,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유령과 함께 산 소녀
폴 D(Paul D): 스위트홈 농장의 노예였던 남자, 세서를 다시 만나 함께 미래를 꿈꾸는 사람
세서의 의(意)가 추구한 것
"내 아이들을 노예로 살게 할 수 없다. 노예로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
이것이 세서의 의(意)가 추구한 미(味)와 법(法)이었습니다. 자식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삶, 인간으로서의 존엄.
하지만 하늘이 던진 것은 달랐습니다. 노예 사냥꾼이 왔습니다. 1850년 도망 노예법에 따라 세서와 아이들을 다시 농장으로 데려가려 했습니다.
세서는 창고로 달려갔습니다. 네 명의 자식을 데리고. 그리고 톱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식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결심한 후, 두 살배기 딸의 목을 베었다."
구부득고(求不得苦) -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세서가 원한 것은 자식들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노예제라는 하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도망쳤지만, 끝까지 쫓아왔습니다.
결국 세서는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딸을 죽인 것입니다.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노예제가 만든 괴로움입니다. 선택지가 "노예로 살기" 아니면 "죽음" 둘 뿐인 상황. 인간다운 삶이라는 선택지는 아예 없었습니다.
원증회고(怨憎會苦) - 미워하는 것을 마주해야 하는 괴로움
딸을 죽인 후 18년 동안, 세서는 빌러비드의 유령과 함께 살았습니다. 매일, 죽인 딸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죄책감과 괴로움이 집 안에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빌러비드가 육체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세서는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음성고(五陰盛苦) - 존재 자체의 괴로움
세서의 몸은 자유였지만, 마음은 여전히 노예였습니다. 스위트홈 농장의 기억, 학교 선생의 조카들이 젖을 빼앗아 마신 기억, 도망치다 아이를 낳은 기억, 딸을 죽인 기억.
몸은 124번지에 있지만, 마음은 과거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음성고입니다. 몸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괴로움입니다.
폴 D가 세서에게 말했습니다.
"세서, 너의 사랑은 너무 짙어... 너는 발이 두 개이지 네 개가 아니야."
세서가 대답했습니다.
"가벼운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불교적 통찰
《빌러비드》를 불교의 눈으로 보면 깊은 통찰이 보입니다.
무상(無常): 노예제도 사라진다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나고 노예제는 폐지되었습니다. 세서도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하늘이 바뀐 것입니다.
하지만 세서의 마음속 노예제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상처가 빌러비드라는 형태로 되돌아와 세서를 괴롭혔습니다.
이것이 무상(無常)의 역설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하늘은 바뀌지만, 내면의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집착: 죄책감에 대한 집착
세서의 집착은 "딸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습니다. 이 집착이 빌러비드를 불러왔고, 세서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만약 세서가 그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면?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자식을 죽인 어머니가 어떻게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빌러비드가 세서를 집어삼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색성향미촉법의 관점
하늘이 던진 것 : 노예제 - 주인이 주는 먹이만 먹어라(미의 박탈) + 도망 노예법(법의 억압)
세서가 추구한 뜻 : 자식들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권리(미) + 인간으로서의 존엄(법)
불일치 → 극단적 선택(살해) → 죄책감 → 유령의 귀환 → 자기 파괴
Primary 욕망은 미(味)였습니다. 음식을 선택할 권리, 삶을 선택할 권리, 인간다운 삶. Secondary 욕망은 법(法)이었습니다. 자유, 존엄.
하지만 노예제는 둘 다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세서는 죽음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자식에게 "자유"를 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실패였습니다. 죽음은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토니 모리슨은 왜 노벨문학상을 받았을까요?
《빌러비드》는 노예제를 다룬 수많은 작품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모리슨은 독특한 방식을 택했습니다. 직접적으로 노예제의 잔혹함을 묘사하는 대신, '음식'이라는 은유를 통해 접근했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주는 것만 먹습니다. 이 단순한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다운 삶의 상실입니다.
우리가 매일 "오늘 뭐 먹지?"라고 고민하는 것은 단순히 음식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어떻게 살지?"라는 질문입니다. 무엇을 먹을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떻게 살지 선택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모리슨은 미(味)라는 감각을 통해 노예제의 본질을 꿰뚫었습니다. 음식 선택권의 박탈 = 주체성의 박탈 = 인간성의 박탈.
그리고 한 가지 더. 모리슨은 빌러비드라는 캐릭터를 통해 "재기억(rememory)"의 중요성을 말했습니다. 과거를 잊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치유할 수 있습니다.
[작품 정의]
《빌러비드》는 노예제 아래에서 음식을 선택할 권리조차 빼앗긴 여성이, 자식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자기 손으로 죽이는 극단적 선택을 한 이야기이며, 인간다운 삶(미)을 추구하는 욕망이 얼마나 근본적이고 보편적인지를 증명한다.
2025년 현재, 우리는 매일 무엇을 먹을지 선택합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선택하고 있을까요?
배달 앱을 열면 수백 개의 식당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중 대부분은 비슷한 메뉴입니다. 치킨, 피자, 중국집, 분식. 자본이 허락한 선택지 안에서만 고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직장인은 점심시간 1시간 안에 먹어야 합니다. 빠르고, 저렴하고, 가까운 곳. 정말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걸까요, 아니면 시간과 돈이 허락하는 것만 먹는 걸까요?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도 비슷했습니다. 가족들이 원하는 음식을 차리고, 아이가 먹을 수 있는 것만 주문하고,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은 나중에. 언제나 나중에.
세서가 노예 주인이 주는 것만 먹었듯이, 김지영은 가족이 원하는 것만 만들었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는 괴로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리슨은 답하지 않습니다. 단지 보여줄 뿐입니다. 세서가 18년 동안 괴로워했고, 빌러비드가 돌아와 더 괴로워했지만, 결국 흑인 공동체의 도움으로 빌러비드를 쫓아냈다는 것을. 혼자서는 불가능했지만, 함께라면 가능했다는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선택할 권리, 그것이 바로 인간다운 삶입니다. 그리고 그 권리를 지키는 것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할 때 가능합니다.
[다음 회 예고] 제3부 17회: "촉의 괴로움 – 도리스 레싱 《19호실로 가다》" - 1960년대 영국. 완벽한 가정을 가진 중년 여성 수잔이 갑자기 호텔 19호실에 숨어듭니다. 남편도, 아이들도, 모든 사회적 역할에서 벗어나 혼자 있고 싶다는 욕망. 촉(觸)이란 무엇일까요? 접촉, 스킨십, 관계. 우리는 타인과의 접촉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 접촉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이 역설적인 욕망이 한 여성을 파괴할 때, 우리는 현대인의 고독이 얼마나 보편적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