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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쫓는 물고기들: 불교로 보는 문학의 풍경

제3부 해외문학과 욕망의 보편성

by 한시을

15회: 향의 괴로움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백 년 동안의 고독》


할머니 집에 가면 특별한 냄새가 났습니다.


오래된 나무 장롱 냄새, 된장찌개 끓는 냄새, 마루에 밴 햇빛 냄새. 그 냄새를 맡으면 '집'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안전하고, 포근하고, 내가 속한 곳이라는 느낌.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 집을 정리하러 갔을 때, 냄새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낯선 공기, 닫힌 창문의 먼지 냄새, 더 이상 음식을 만들지 않는 부엌. 같은 공간인데 완전히 다른 곳이 되어 있었습니다.


냄새가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집니다. 정체성도 사라집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 콜롬비아)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은 바로 이 '향(香)'의 이야기입니다. 한 가문이 100년 동안 자신들의 향기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그 향기는 바람에 날아가 사라졌습니다.


마콘도라는 향기: 부엔디아 가문의 시작


하늘 (시대정신, 질서)


19세기 말 콜롬비아. 하지만 《백 년 동안의 고독》의 하늘은 특별합니다. 실제 역사와 환상이 뒤섞인 '마술적 리얼리즘'의 하늘입니다.


마콘도라는 작은 마을.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세운 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현실의 콜롬비아이면서 동시에 환상의 공간입니다. 사람들은 불면증에 걸려 기억을 잃고, 비가 4년 11개월 2일 동안 내리며,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옵니다.


하지만 이 모든 환상 뒤에는 실제 역사가 있습니다. 콜롬비아의 식민지배, 내전, 바나나 회사의 착취. 마술적 리얼리즘은 환상이 아닙니다. 현실이 너무 끔찍해서 환상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먹이 (욕망의 대상)


Primary 먹이: 향(香) - 정체성, 부엔디아 가문의 고유함,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욕망


Secondary 먹이: 법(法) - 영속성, 가문이 100년 동안 이어지기를 바라는 욕망, 역사에 남고 싶은 욕망


부엔디아 가문이 쫓은 먹이는 무엇이었을까요?


향(香)입니다. 여기서 향은 단순한 냄새가 아닙니다. 정체성입니다. 부엔디아 가문만의 고유한 특성, "우리는 부엔디아다"라는 존재 증명입니다.


그리고 법(法)입니다. 영속성입니다. 100년 동안, 아니 영원히 이 가문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욕망입니다.


부패의 악취와 삶의 향기: 마술적 리얼리즘의 냄새들


마르케스는 천재적으로 '냄새'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호세 아르카디오의 화약 냄새


부엔디아 가문의 창시자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 그는 연금술에 빠져 금을 만들려 했습니다. 실험실에서 화약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야망의 냄새였습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욕망,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려는 집착.


하지만 그는 미쳐버렸습니다. 마을 광장의 밤나무에 묶여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지구는 둥글다." 아무도 듣지 않는 진리를 외쳤습니다.


레베카의 흙 냄새


고아 소녀 레베카가 마콘도에 왔습니다. 그녀는 부모의 뼈를 담은 자루를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습관이 있었습니다. 흙을 먹는 것입니다.


"레베카는 정원의 축축한 흙을 손가락으로 파내어 입에 넣었다. 그 맛은 달콤했고, 어머니의 냄새가 났다."


흙 냄새. 이것은 레베카가 잃어버린 부모,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욕망의 냄새였습니다. 그녀는 흙을 먹으며 "나는 어디서 왔는가?"를 물었습니다.


아마란타의 쓴 아몬드 냄새


아마란타는 평생 레베카를 증오했습니다. 레베카가 자신이 사랑한 남자를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란타는 결혼하지 않았고, 홀로 늙어갔습니다. 그녀의 방에서는 쓴 아몬드 냄새가 났습니다.


"아마란타의 방에서는 항상 쓴 아몬드 냄새가 났다. 그것은 그녀의 외로움이 발효되어 나오는 냄새였다."


쓴 냄새. 이것은 고독의 냄새였습니다. 사랑하지 못한 삶의 냄새, 증오로 가득 찬 영혼의 냄새였습니다.


멜키아데스의 양피지 냄새


집시 멜키아데스는 부엔디아 가문의 100년을 예언한 양피지를 남겼습니다. 그 양피지에서는 오래된 잉크와 종이의 냄새가 났습니다.


마지막 부엔디아, 아우렐리아노가 양피지를 해독하는 순간, 그는 깨달았습니다. 양피지에 적힌 것은 바로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였습니다. 모든 것이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양피지를 읽는 동안 아우렐리아노는 자신이 읽고 있는 순간도 이미 양피지에 적혀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마콘도는 바람에 날아갈 것이다.'"


양피지의 냄새는 운명의 냄새였습니다. 부엔디아 가문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냄새였습니다.


바나나 회사의 기계유 냄새


외국 바나나 회사가 마콘도에 들어왔습니다. 기차가 왔고, 기계가 왔고, 외국인들이 왔습니다. 마을에 기계유와 쇳가루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부엔디아 가문의 고유한 향기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콘도는 더 이상 부엔디아의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자본의 냄새, 제국주의의 냄새가 모든 것을 덮었습니다.


물고기 (인간)


부엔디아 가문: 100년 동안 이어진 가문, 자신들의 향기(정체성)를 지키려 한 물고기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 마콘도를 세운 창시자

우르술라: 100년을 산 여자, 가문을 지키려 한 여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 32번의 내전을 일으킨 군인

마지막 아우렐리아노: 양피지를 해독한 후 바람에 날아간 마지막 부엔디아


괴로움의 구조


부엔디아 가문의 의(意)가 추구한 것


"우리는 부엔디아다. 우리의 정체성은 영원하다. 우리는 100년, 아니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의(意)가 추구한 향(정체성)과 법(영속성)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던진 것은 달랐습니다. 식민지배, 내전, 자본주의, 바나나 회사. 외부의 힘들이 마콘도를 침범했습니다. 부엔디아 가문의 고유한 향기는 조금씩 희석되었습니다.


순환의 괴로움


더 끔찍한 것은 부엔디아 가문 내부의 반복이었습니다. 같은 이름이 반복되었습니다. 호세 아르카디오, 아우렐리아노. 이 두 이름이 세대마다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성격, 같은 운명이 반복되었습니다. 호세 아르카디오는 항상 충동적이고 거칠었습니다. 아우렐리아노는 항상 고독하고 냉정했습니다. 마치 저주처럼, 부엔디아 가문은 같은 패턴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근친상간도 반복되었습니다. 가장 끔찍한 것은 마지막 부엔디아, 아우렐리아노와 그의 고모 아마란타 우르술라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돼지 꼬리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부엔디아 가문의 저주가 완성된 순간이었습니다.


구부득고(求不得苦) -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부엔디아 가문은 영속성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아이가 돼지 꼬리를 가지고 태어나 개미에게 잡아먹혔을 때,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아우렐리아노가 양피지를 해독하는 순간, 그는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순환이었습니다. 부엔디아 가문은 영속하지 못했습니다. 100년 만에, 예언대로, 마콘도는 바람에 날아갔습니다.


원증회고(怨憎會苦) - 미워하는 것을 마주해야 하는 괴로움


부엔디아 가문은 고독했습니다. 서로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서로를 증오했습니다. 아마란타는 평생 레베카를 증오했습니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32번의 내전을 일으켰지만, 결국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고독 속에서 살았고, 고독 속에서 죽었습니다. 같은 집에 살았지만, 서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음성고(五陰盛苦) - 존재 자체의 괴로움


부엔디아 가문의 가장 깊은 괴로움은 존재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누구인가?"를 물었지만, 답은 없었습니다. 같은 이름, 같은 성격, 같은 운명의 반복. 개인의 정체성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순환이었습니다.


마지막 아우렐리아노가 양피지를 읽으며 깨달았듯이,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는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자유의지도, 선택도 없었습니다. 그저 예언을 따라 살다가 사라지는 것뿐이었습니다.


문학과 철학의 교차점: 향기의 무상함


불교적 통찰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불교의 눈으로 보면 깊은 통찰이 보입니다.


무상(無常): 모든 향기는 사라진다

부엔디아 가문의 향기는 100년 만에 사라졌습니다. 마콘도라는 마을도 바람에 날아갔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정체성도, 아무리 고유한 향기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할머니 집의 냄새가 사라지듯, 부엔디아 가문의 냄새도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무상(無常)입니다.


공(空): 정체성도 비어있다

부엔디아 가문이 추구한 정체성은 무엇이었을까요? 같은 이름의 반복, 같은 성격의 반복.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정체성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은 없었고, 오직 패턴만 있었습니다.


불교는 '나'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부엔디아 가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찾으려 한 향(정체성)은 처음부터 비어 있었습니다.


집착: 영속성에 대한 집착

부엔디아 가문의 집착은 영속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원하다." 하지만 그 집착이 괴로움을 만들었습니다. 영원하려 하면 할수록, 더 빨리 무너졌습니다.


근친상간도 영속성에 대한 집착에서 나왔습니다. "순수한 부엔디아 피를 지키자." 하지만 그 집착의 결과는 돼지 꼬리를 가진 아이였습니다.


색성향미촉법의 관점


하늘이 던진 것: 식민지배, 내전, 자본주의의 침략 → 정체성 상실(향의 희석)


부엔디아 가문이 추구한 뜻: 정체성(향) + 영속성(법)


불일치 → 순환적 반복, 근친상간, 고독, 소멸


Primary 욕망은 향(香)이었습니다. 정체성,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 Secondary 욕망은 법(法)이었습니다. 영속성, "우리는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라는 믿음.


하지만 둘 다 실패했습니다. 정체성은 반복 속에서 개성을 잃었고, 영속성은 100년 만에 끝났습니다.


마술적 리얼리즘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


마르케스는 왜 노벨문학상을 받았을까요?


마술적 리얼리즘. 현실과 환상을 섞은 이 독특한 방식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마르케스는 '향(香)'이라는 감각을 통해 정체성의 문제를 완벽하게 형상화했습니다.


할머니 집 냄새, 레베카의 흙 냄새, 아마란타의 쓴 아몬드 냄새. 냄새는 가장 원시적이고 강력한 감각입니다. 냄새는 기억을 불러오고, 정체성을 구성합니다.


마르케스는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를 '냄새의 변화'로 그려냈습니다. 화약 냄새에서 시작해, 기계유 냄새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모든 냄새가 바람에 날아가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정체성의 무상함입니다. 아무리 고유한 향기도 결국 사라진다는 진리를 마르케스는 100년의 서사로 증명했습니다.


[작품 정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은 부엔디아 가문이 자신들의 고유한 향기(정체성)와 영속성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순환적 반복과 외부의 침략 속에서 100년 만에 바람에 날아가 사라지는 이야기이며, 정체성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무상한지를 증명한다.


우리는 여전히 향기를 찾고 있습니다


2025년 현재, 우리는 여전히 "나는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딸인가, 아내인가, 엄마인가, 며느리인가?" 부여된 역할 속에서 자신의 향기(정체성)를 찾으려 했습니다.


SNS에서 우리가 올리는 모든 게시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나다." 자신의 향기를 세상에 알리려는 욕망입니다. 브랜드를 입고, 특정 음식을 먹고, 특정 장소에 가는 것도 향기를 만드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부엔디아 가문이 증명했듯이, 향기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할머니 집 냄새가 사라지듯, 우리의 정체성도 변하고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르케스는 답하지 않습니다. 단지 보여줄 뿐입니다. 부엔디아 가문이 100년 동안 펄떡였고, 결국 바람에 날아갔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펄떡임이 문학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의 향기도 언젠가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향기를 찾으려는 욕망, 그 괴로운 펄떡임은 계속될 것입니다.


[다음 회 예고] 제3부 16회: "미의 괴로움 –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 1850년대 미국 켄터키. 노예 세서는 자신의 딸 빌러비드를 죽였습니다. 노예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죽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미(味)란 무엇일까요? 단순한 음식의 맛이 아닙니다.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내가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노예는 주인이 주는 것만 먹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맛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빼앗긴 주체성의 상징으로서의 음식, 그리고 그것을 되찾기 위한 극단적 선택. 모리슨의 걸작에서 우리는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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