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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쫓는 물고기들: 불교로 보는 문학의 풍경

제3부. 해외문학과 욕망의 보편성

by 한시을

14회: 성(聲)의 괴로움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1945년 5월 9일, 베를린 함락.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붉은 광장에서 승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탱크가 지나가고, 병사들이 행진했습니다. 스탈린이 연설했습니다. 카메라가 영웅들을 찍었습니다. 모두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소련의 백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전투기 조종사, 저격수, 탱크 병사, 의무병. 그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왜 카메라는 그들을 찍지 않았을까요? 왜 역사책에는 그들의 이름이 없을까요?


70년 동안,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아니, 침묵당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 사회는 여성들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라. 어머니가 되고 아내가 되어라. 전쟁 이야기는 남자들이 한다."


그들은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전선에 있었다고요? 그럼... 독일군과 뭘 했나요?" 사람들은 그렇게 물었습니다. 여자가 전쟁터에 있었다는 것은 곧 부도덕함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70년 동안.


침묵당한 목소리들


1978년, 벨라루스의 한 작가가 묻기 시작했습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vetlana Alexievich,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 벨라루스)는 간단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전쟁터에 간 여성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공식 역사는 답하지 않았습니다. 영웅적인 남자 병사들의 이야기만 가득했습니다. 탱크를 몰고 베를린으로 진격한 병사, 독일군 진지에 폭탄을 던진 병사, 마지막 한 발까지 싸운 병사. 모두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알렉시예비치는 알고 있었습니다. 전쟁터에 여자들도 있었다는 것을. 그들도 총을 쏘고, 피를 흘리고, 죽었다는 것을. 그런데 왜 아무도 그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걸까요?


알렉시예비치는 수백 명의 여성 참전 용사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고 싶어 했습니다. 70년 동안 침묵했지만, 누군가 물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늘 (시대정신, 질서)

1941-1945년 소련 제2차 세계대전.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의 하늘이 더 중요합니다. 전후 소련 사회는 여성들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전쟁은 끝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 어머니가 되고, 아내가 되어라. 전쟁 이야기는 남자들이 한다."


먹이 (욕망의 대상)

Primary 먹이: 성(聲) - 들리고 싶은 욕망, 기록되고 싶은 욕망, "나는 존재했다"라고 증명하고 싶은 욕망

Secondary 먹이: 법(法) - 진실을 말하고 싶은 욕망,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싶은 욕망


여성 참전 용사들이 쫓은 먹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영웅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의심받고, 수치스러워하고, 침묵해야 했습니다.


"당신은 전선에 있었다고요? 그럼... 독일군과 뭘 했나요?" 사람들은 그렇게 물었습니다. 여자가 전쟁터에 있었다는 것은 곧 부도덕함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알렉시예비치가 만난 한 여성 저격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사람을 쏜 날을 기억합니다. 독일군 장교였어요. 조준경으로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아주 젊었어요. 나보다 나이가 많지 않았어요.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그가 쓰러졌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토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공식 역사에 없습니다. 공식 역사는 "영웅적인 저격수가 적을 처치했다"고만 기록합니다. 하지만 그 저격수가 열아홉 살 소녀였다는 것, 그녀가 처음 사람을 죽인 후 토했다는 것, 그 후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생리대가 없었습니다"


또 다른 여성 병사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전선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몰라요. 우리에게는 군복도 맞지 않았어요. 남자 군복을 입어야 했죠. 군화도 커서 발에 물집이 생겼어요. 그리고... 생리대가 없었어요. 붕대를 썼습니다. 하지만 전투 중에는 그것조차 교체할 수 없었어요."


이 이야기도 공식 역사에 없습니다. 전쟁사는 전략, 전투, 승리만 기록합니다. 여자 병사의 생리, 맞지 않는 군복, 발의 물집 같은 것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됩니다.


하지만 알렉시예비치는 정확히 이런 것들을 기록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진짜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웅적인 전투가 아니라, 매일 밤 울고, 생리대를 구하고, 맞지 않는 군화를 신고 행군하는 것이 진짜 전쟁이었습니다.


"나는 탱크 병사였습니다"


한 여성 탱크 병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탱크 안은 지옥이었어요. 여름에는 50도가 넘었고, 겨울에는 얼어붙었어요. 포탄이 맞으면 탱크 안이 불바다가 되었죠. 나는 동료가 불타는 것을 봤어요. 그 냄새를... 살이 타는 냄새를요. 지금도 고기 굽는 냄새를 맡으면 토할 것 같아요."


공식 역사는 "우리의 탱크 부대가 적을 격파했다"라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그 탱크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이 타는 냄새가 얼마나 끔찍한지, 그것이 평생 트라우마로 남는지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물고기 (인간)


여성 참전 용사들: 전쟁터에서 싸웠지만, 전후 사회에서 침묵당한 물고기들

알렉시예비치: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려는 물고기


알렉시예비치 자신도 물고기였습니다. 그녀는 소련 정부의 검열과 압박을 받았습니다. "왜 이런 불필요한 이야기를 기록하느냐?" "전쟁의 영광을 훼손하지 마라."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쫓은 먹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성(聲), 즉 침묵당한 목소리를 기록하고 싶은 욕망이었습니다. 그리고 법(法), 즉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진실을 말하고 싶은 욕망이었습니다.


괴로움의 구조


여성 참전 용사들의 괴로움


그들의 의(意)가 추구한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도 전쟁에 참여했다. 우리도 피를 흘렸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달라." 이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던진 것은 침묵의 강요였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라. 전쟁 이야기는 하지 마라. 여자답게 살아라."


구부득고(求不得苦) - 원하는 것(목소리를 내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입니다.

원증회고(怨憎會苦) - 미워하는 것(침묵의 강요)을 매일 마주해야 하는 괴로움입니다.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70년 동안 침묵했습니다. 남편에게도, 자식들에게도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그냥 잊고 싶었어요. 하지만 잊을 수 없었어요. 매일 밤 악몽을 꿨어요. 70년 동안."


이것이 침묵당한 목소리의 괴로움입니다.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고,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괴로움입니다.


알렉시예비치의 괴로움


알렉시예비치 자신도 괴로웠습니다. 그녀는 수백 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트라우마를 함께 겪어야 했습니다. 어떤 여성은 인터뷰 중에 울음을 터뜨렸고, 어떤 여성은 말을 하다가 기절했습니다.


그리고 소련 정부는 그녀를 탄압했습니다. 책 출판을 금지했고, 그녀를 "반역자"로 낙인찍었습니다. 2000년대까지 그녀는 벨라루스에서 추방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쫓은 먹이, 즉 침묵당한 목소리를 기록하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문학과 철학의 교차점: 목소리의 보편성


불교적 통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불교의 눈으로 보면 깊은 통찰이 보입니다.


무상(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 전쟁도 끝났고, 소련도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침묵당한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70년이 지나도 여전히 들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空): 역사도 비어있다 공식 역사가 진실일까요? 아닙니다. 역사도 비어있습니다.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 기록되고, 누군가의 이익에 의해 왜곡됩니다. 알렉시예비치는 이 공(空)을 폭로했습니다.


색성향미촉법의 관점


전후 소련이 던진 것: 침묵의 강요(법) + 여성의 역할(촉)

여성 참전 용사들이 추구한 뜻: 목소리(성) + 진실(법)

불일치 → 70년간의 침묵, 트라우마, 정체성 상실


Primary 욕망은 성(聲)이었습니다. 들리고 싶은 욕망, 기록되고 싶은 욕망, "나는 존재했다"라고 증명하고 싶은 욕망. 이것이 가장 강력했습니다.


Secondary 욕망은 법(法)이었습니다. 진실을 말하고 싶은 욕망,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싶은 욕망.

하지만 하늘이 던진 것은 정반대였습니다. 침묵하라(성의 억압)는 강요, 여자답게 살아라(법의 왜곡)는 강요.


르포르타주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


알렉시예비치는 소설가가 아닙니다. 그녀는 기자이자 논픽션 작가입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소설이 아니라 르포르타주, 즉 실제 인터뷰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왜 노벨문학상을 받았을까요?


노벨 위원회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녀의 다성적 저술은 우리 시대의 고통과 용기에 대한 기념비이다."


다성적(polyphonic) 저술. 여러 목소리를 담은 글. 알렉시예비치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수백 명의 여성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각각의 목소리가 서로 다르고, 때로는 모순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입니다.


목소리 자체가 문학이 되었습니다.


문학이 뭔가요? 인간의 경험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소설이든 시든 르포르타주든 형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침묵당한 자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알렉시예비치는 이것을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그래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작품 정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70년 동안 침묵당했던 목소리(聲)를 복원하여, 들리고 싶고 기록되고 싶은 욕망이 얼마나 강렬하고 보편적인지를 증명하는 작품이며, 목소리 자체가 문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전히 침묵당하고 있습니까?


2025년 현재, 우리는 소셜 미디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트위터에 글을 올리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유튜브에 영상을 올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침묵당하지 않는 걸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침묵당하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의 목소리, 소수자의 목소리. 그들은 말하려 하지만, "조용히 해라", "문제 삼지 마라", "네가 예민한 거야"라는 말을 듣습니다.


알렉시예비치가 70년 전 여성 참전 용사들의 목소리를 복원했듯이, 지금도 누군가는 침묵당한 목소리를 복원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2017년 미투(#MeToo) 운동이 그랬습니다. 수십 년 동안 침묵했던 성폭력 피해자들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쫓은 먹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성(聲), 즉 들리고 싶은 욕망이었습니다.


우리가 온라인에 글을 올리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존재를 증명하고 싶습니다. "나는 여기 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누군가 듣고 있기를, 누군가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성(聲)의 욕망입니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욕망입니다.


우리 모두는 들리고 싶어 하는 물고기입니다.


[다음 회 예고] 제3부 15회: "향의 괴로움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 년 동안의 고독》" - 콜롬비아의 작은 마을 마콘도. 부엔디아 가문은 100년 동안 영속하려 하지만 결국 순환적 고독으로 끝납니다. 향(香)이란 무엇일까요? 정체성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현실과 환상을 섞어 표현한 마르케스의 걸작에서, 우리는 존재의 영속성을 갈망하지만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보편적 괴로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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