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한국문학 – 하늘과 먹이의 교차
누군가 묻습니다. "왜 나는 외로울까요?"
1980년대라면 이렇게 답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독재에 맞서 함께 싸워야 합니다." 2000년대라면? "우리는 함께 자본에 맞서야 합니다." 하지만 2020년대 지금은? "나는 누구인가요? 나만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같은 질문, 완전히 다른 답변입니다. 무엇이 바뀐 걸까요?
지금까지 우리는 세 개의 현대 하늘을 지나왔습니다. 독재의 하늘(9회), 자본의 하늘(10회), 신자유주의의 하늘(11회). 각각의 하늘 아래에서 물고기들이 추구한 욕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리고 왜 문학은 집단의 저항에서 개인의 정체성 문제로 이동했는지 정리해보겠습니다.
독재의 하늘 - 법(法)의 시대: 집단적 정의
1970-80년대.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먹이로 던졌고, 전두환은 3S정책(영화, 스포츠, 섹스)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반체제 금지, 체제 순응이라는 법을 강요했습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 1980년 5월, 광주. 동호는 도청에 남았습니다. "형, 우리 도망가면 안 됩니까?" 친구가 물었지만 동호는 답했습니다. "여기 남아야 합니다." 왜 남았을까요? 동호의 의(意)가 추구한 것은 민주주의라는 법이었습니다. 독재가 던진 법(순응)과 정면 충돌했습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70년대, 난장이는 철거되었습니다. "여기가 우리 집인데 왜 나가야 합니까?" 개발독재가 던진 법(경제성장)과 난장이가 추구한 법(생존권) 사이의 충돌이었습니다. 난장이 아버지는 공장 굴뚝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달나라를 향해.
독재 시대, Primary 욕망은 명확했습니다. 법(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던진 법(순응, 경제성장 우선)이 아니라, 물고기들의 의가 추구한 법(민주주의, 인권, 정의)이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법이 아니라 집단의 법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민주주의를 쟁취해야 한다." 집단적 저항, 집단적 정의였습니다.
자본의 하늘 - 향(香)에서 법(法)으로: 정체성에서 정의로
1990년대. 독재가 무너졌습니다. 민주화가 왔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하늘이 들어섰습니다. 돈이 하늘이 되었습니다. 자본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1993년,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민주화 직후, 대학 시절 페미니즘을 배운 세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혜완, 경혜, 영선. 그들이 추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향(香)"이었습니다. 여기서 향은 정체성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던진 것은 달랐습니다. "경력도 쌓아라, 그런데 육아도 완벽하게 해라." 자본주의적 성공과 가부장적 역할을 동시에 요구했습니다. 혜완은 홀로 서려 하지만 의존성을 발견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경혜는 화려한 결혼생활 뒤의 공허함을 겪었습니다. 영선은 남편 성공의 그늘에서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공지영의 《도가니》. 2009년, 자본은 정의마저 매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재단 이사장과 교장은 돈으로 경찰을, 검사를, 판사를 매수했습니다. 장애 아동들은 성폭력을 당했고, 진실을 폭로한 강인호는 법정에서 졌습니다.
강인호의 의(意)가 추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정의였습니다. 아이들을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하고, 진실을 밝히는 것. 하지만 자본이 던진 법은 달랐습니다. "돈이 있으면 법도 살 수 있다." 이것이 자본 하늘의 법이었습니다.
자본의 하늘 아래, Primary 욕망이 이동했습니다. 1990년대에는 향(정체성)이었지만, 2000년대에는 법(정의)으로 진화했습니다. 자본이 개인의 정체성만이 아니라 사회의 정의까지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집단의 문제였습니다. 여성이라는 집단, 장애 아동이라는 집단, 약자 집단. "우리는 함께 자본에 맞서야 한다." 집단적 연대의 시대였습니다.
신자유주의의 하늘 - 향(香)의 시대: 개인적 정체성
2010년대. 하늘이 또 바뀌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더 정교해졌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완성되었습니다. "경쟁하라." "효율적으로 살아라." "자기계발하라." "성공하라."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2016년. 김지영이 추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민주주의? 아니었습니다. 경제적 생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김지영의 의(意)가 절박하게 물었던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향(香)입니다. 여기서 향은 냄새가 아닙니다. 정체성입니다. 존재의 고유함입니다. 자기 자신의 정의입니다.
하늘이 던진 것은 달랐습니다. "너는 딸이야", "너는 아내야", "너는 엄마야", "너는 며느리야". 김지영에게 주어진 것은 역할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지영의 의가 추구한 향(정체성)은 "나는 김지영이다"였습니다. 역할이 아니라 자기 자신. 충돌이 일어났고, 김지영은 정신적 증상을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빙의하는 것. '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하늘 아래, Primary 욕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집단적 법(정의)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적 향(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함께"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로 질문이 바뀐 것입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독재 시대: 집단 vs 집단
1970-80년대, 독재 권력 vs 민주화 세력. 명확한 집단 대 집단의 구도였습니다. 개인은 집단 안에 존재했습니다. 동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도청에 함께 남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난장이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철거당하는 도시 빈민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싸운다." 집단의 법(민주주의)을 위해 집단으로 저항했습니다.
자본 시대: 계급 vs 계급 (여전히 집단)
1990~2000년대, 자본가 vs 약자. 가진 자 vs 못 가진 자. 여전히 집단 대 집단이었습니다. 무쏘뿔의 세 여성은 "여성"이라는 집단 안에 있었습니다. 도가니의 장애 아동들, 권력 없는 약자들도 집단으로 존재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자본에 맞선다." 집단의 정체성(향)과 집단의 정의(법)를 위해 연대했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 개인 vs 시스템 (집단 해체)
2010년대 이후, 구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명확한 집단이 없습니다. 김지영은 누구와 연대해야 할까요? 같은 82년생 여성들? 하지만 그들도 각자 다른 상황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커리어우먼, 어떤 사람은 전업주부, 어떤 사람은 독신. 집단이 해체되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교묘하게 개인화를 강요했습니다. "능력만 있으면 돼." "네 문제는 네가 해결해." 집단적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물고기들은 혼자 펄떡이기 시작했습니다. 집단의 법(우리의 정의)이 아니라 개인의 향(나의 정체성)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물고기들이 바꿉니다. 여전히.
1단계: 개인 차원의 충돌
독재 시대든, 자본 시대든, 신자유 시대든 마찬가지입니다. 6개 감각기관(안이비설신의)이 하늘이 던진 먹이(색성향미촉법)를 인식합니다. 특히 의(意)가 핵심입니다. 의가 법을 인식하고, 의가 향을 추구합니다.
하늘이 던진 것과 의가 추구한 것이 일치하면 순응입니다. 불일치하면 거역입니다. 동호의 의는 독재를 거부했고, 혜완의 의는 의존을 거부했고, 강인호의 의는 부패한 정의를 거부했고, 김지영의 의는 부여된 역할을 거부했습니다.
2단계: 사회 차원의 연대와 충돌 (변화가 있음)
여기서 차이가 나타납니다.
독재 시대: 비슷한 의를 가진 물고기들이 쉽게 모였습니다. 5.18 광주에서, 6월 항쟁에서, 명확한 집단 형성이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민주화를 쟁취한다." 강물이 거세게 흘렀습니다.
자본 시대: 여전히 집단 형성이 가능했습니다. 페미니스트 그룹, 인권 단체, 시민 단체. 성별 연대, 약자 연대가 작동했습니다. 강물이 흘렀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 집단 형성이 어렵습니다. 개개인의 상황이 너무 다릅니다. SNS에서는 모이지만 실제 연대는 약합니다. 김지영은 혼자였습니다. 강물이 약해졌습니다. 개별 물고기들이 흩어져서 각자 펄떡이고 있습니다.
3단계: 시스템 차원의 변혁 (현재는 정체)
4.19로 이승만이 무너졌습니다. 6월 항쟁으로 전두환이 무너졌습니다. 집단의 강물이 하늘을 바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자유주의 하늘은 여전히 강고합니다. 왜 그럴까요? 개별 물고기들의 괴로움이 강물로 모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지영의 괴로움은 개인적 정체성 위기로 남아있습니다. 아직 집단적 강물로 합쳐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물고기들은 여전히 펄떡이고 있습니다. 조금씩, 천천히, 연대의 가능성을 찾고 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이 100만 부 팔린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개인의 괴로움이 집단의 공감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강물이 조금씩 모이고 있습니다.
50년을 돌아보니 명확합니다.
변한 것:
하늘 (독재 → 자본 → 신자유주의)
Primary 욕망의 대상 (법-집단적 정의 → 향-정체성 → 법-정의 → 향-개인적 정체성)
연대의 형태 (집단적 → 계급적/성별적 → 개인화)
강물의 흐름 (거센 강물 → 흐르는 강물 → 흩어진 물방울)
변하지 않은 것:
물고기의 욕망 구조 (안이비설신의로 색성향미촉법을 지각한다는 것 자체)
하늘이 던진 것과 의가 추구한 것의 불일치
괴로움의 발생 (구부득고, 원증회고, 오음성고)
거역하는 물고기의 존재
문학의 본질: 배고픈 물고기의 펄떡임 기록
동호도, 난장이도, 혜완도, 강인호도, 김지영도 모두 같은 구조 안에 있었습니다. 하늘이 던진 것과 자신의 의가 추구한 것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거역했고, 괴로워했고, 펄떡였습니다. 그 펄떡임이 문학이 되었습니다.
독재 시대든 신자유주의 시대든, 집단적 법이든 개인적 향이든, 본질은 같습니다.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 이것이 문학의 영원한 원료입니다.
독재 시대 문학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민주주의를 쟁취해야 한다." 자본 시대 문학은 말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지만 우리는 함께 자본에 맞서야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문학은 말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물음의 형태가 바뀌었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하늘이 강요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가 추구하는 것을 찾으려는 물고기의 펄떡임. 이것이 문학입니다.
그리고 이 펄떡임은 영원합니다. 하늘이 바뀌어도, 먹이가 바뀌어도, 물고기는 여전히 펄떡입니다. 왜냐하면 욕망과 현실은 결코 완전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발견한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진리이고, 동시에 문학이 영원한 이유입니다.
한국 문학 500년을 지나왔습니다. 봉건, 식민, 분단, 독재, 자본, 신자유. 여섯 개의 하늘을 보았고, 수많은 물고기들의 펄떡임을 목격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해외 노벨문학상 작품으로 눈을 돌립니다. 일본의 하늘, 러시아의 하늘, 라틴아메리카의 하늘, 미국의 하늘. 영국의 하늘, 프랑스의 하늘.그곳의 물고기들도 펄떡였을까요? 그들이 쫓은 먹이는 무엇이었을까요?
놀랍게도, 같은 구조가 보일 것입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雪國)』(1968년 수상)의 색(色),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2015년 수상)의 聲(성),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 년 동안의 고독』 (1982년 수상)의 香 (향),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Beloved)』 (1993년 수상)의 味 (미), 도리스 레싱, 『19호실로 가다』(단편집) (2007년 수상)의 觸 (촉),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1969년 수상)의 法 (법).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욕망의 구조는 동일합니다.
이것이 문학의 보편성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보편성입니다. 우리는 모두 끝없이 펄떡이는 물고기이니까요.
[다음 회 예고] 제3부 13회: "색의 괴로움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 노벨문학상으로 세계문학의 문을 엽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흰 눈. 게이샤 고마코. 시마무라는 왜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없었을까요?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고통으로 귀결되는 과정, 색(色)의 괴로움을 살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