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명절이 두려운 이유
명절 일주일 전, 한 대형마트 식자재 코너.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전 부치는 재료를 가득 담은 카트를 밀고 있었다. 녹두전, 동그랑땡, 생선전, 부침개... 계산대에서 만난 그녀에게 물었다.
"명절 준비하시나 봐요."
"네, 시댁 가야 해서요."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힘드시겠어요."
"사실 음식 준비는 그나마 괜찮아요. 요즘엔 반조리 식품도 많잖아요. 진짜 문제는..." 그녀가 말을 멈췄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명절 노동의 실상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한 글이 화제가 됐다.
"명절 음식 준비 시간 재봤어요."
글쓴이는 명절 하루 전날부터 당일까지 자신의 노동시간을 기록했다. 장보기 3시간, 재료 손질 4시간, 조리 6시간, 설거지 2시간. 총 15시간.
"15시간 일했는데 받은 건 '수고했어' 한마디."
댓글들이 쏟아졌다.
"저는 18시간 나왔어요."
"허리 아파서 병원 갔는데 '명절증후군'이래요."
"손가락 베이고 화상 입고... 산재 신청하고 싶어요."
통계를 보면 더 명확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4년 조사에 따르면, 명절 음식 준비에 투입되는 평균 시간은 며느리 14.2시간, 딸 3.1시간, 아들 0.8시간이었다.
[현재의 데이터]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절 가사노동 실태조사』 (2024)
며느리 평균 음식 준비 시간: 14.2시간
딸 평균 음식 준비 시간: 3.1시간
아들 평균 음식 준비 시간: 0.8시간
명절 후 병원 방문 (여성): 23% 증가
주요 증상: 요통, 손목통증, 화상, 스트레스성 두통
그렇다면 음식 준비가 힘들어서 명절이 싫은 걸까?
사고실험: 배달시켜도 가기 싫다
34세 H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시댁에서 명절 음식을 전부 배달시켜 먹는다면 어떨까요? 아무것도 준비 안 해도 된다면?"
H씨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그래도 가기 싫을 것 같아요."
왜?
"음식 준비가 힘든 건 사실이에요.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고, 허리는 아프고. 근데 그게 다가 아니거든요."
H씨는 작년 명절을 떠올렸다.
"작년에 시어머니가 몸이 안 좋으셔서 음식을 거의 다 사오셨어요. 저는 데우기만 했고요. 그럼 편했냐고요? 아니요."
왜 편하지 않았을까?
"음식 준비하든 안 하든, 제 위치는 똑같거든요. 부엌에 혼자 있어요. 남편이랑 시동생들은 거실에서 TV 보고, 저는 음식 데우고, 상 차리고, 설거지하고. 배달음식이든 제가 만든 음식이든 상관없이 저는 '일하는 사람'이에요."
42세 I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시댁에서 한식뷔페 시켜 먹은 적 있어요. 그런데 제가 뭐 했는지 아세요? 배달온 음식 그릇에 예쁘게 담고, 상 차리고, 식탁 닦고, 설거지하고. 결국 똑같더라고요."
I씨가 쓴웃음을 지었다.
"음식 만드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에요. 거기서 제가 어떤 존재인지가 문제죠."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
37세 J씨의 이야기는 더 구체적이다.
"작년 추석에 제가 실험을 해봤어요. 음식을 거의 다 만들어갔거든요. 전도 부치고, 나물도 무치고, 탕까지. 집에서 거의 8시간 걸렸어요."
시댁 반응은?
"시어머니가 '고생했네' 한마디. 끝. 근데 시동생이 포도 한 송이 사 오니까 '우리 아들 효자네' 이러시더라고요. 저는 8시간 일했는데 한마디, 포도 사온 아들은 효자."
J씨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깨달았어요. 아, 이건 노동의 문제가 아니구나. 내가 아무리 많이 해도 '며느리가 당연히 할 일'일 뿐이고, 아들은 뭘 해도 '효자'구나."
손님인가, 가족인가, 일꾼인가
38세 K씨는 명절날 거실과 부엌의 풍경을 비교했다.
"거실에는 시아버지, 남편, 시동생이 앉아서 TV 봐요. 부엌에는 저랑 제수씨가 있고요. 거실은 쉬는 공간, 부엌은 일하는 공간. 그 경계가 너무 명확해요."
그 경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족인지 직원인지의 경계 같아요. 거실에 있는 사람들은 가족이고, 부엌에 있는 사람들은... 뭐랄까요, 일하러 온 사람들?"
K씨는 최근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한다.
"명절날 제가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어요. 그냥 TV 보면서.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부엌에서 좀 도와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남편한테는 안 그래요. 아들은 거실에 있어도 되는데, 며느리는 안 되는 거죠."
문제는 정체성이다
의례 연구자 디미트리스 지갈라타스는 그의 저서 『Ritual』에서 의례가 참여자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말한다.
[지갈라타스의 이론]
의례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누구인가"를 규정한다. 제사라는 의례 속에서 아들은 "효 자"가 되고, 며느리는 "일꾼"이 된다. 같은 행위를 해도 부여받는 정체성이 다르다.
의례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어떤 정체성을 부여받느냐다. 그 정체성이 긍정적이고 인정받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기꺼이 노동한다. 하지만 부정적이거나 평가절하되는 정체성이라면, 같은 노동이라도 착취로 느껴진다.
며느리가 제사를 거부하는 이유는 노동이 힘들어서가 아니다. 그 노동을 통해 부여받는 정체성이 견딜 수 없어서다.
교회 봉사 vs 제사 준비
34세 L씨는 흥미로운 비교를 제시했다.
"저 교회에서 주방 봉사 해요. 한 달에 두 번.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예배 후 식사 준비하죠. 100명분 넘게 만들어요."
그런데 시댁 제사는 안 간다.
"시댁 제사 준비보다 교회 봉사가 훨씬 더 힘들어요. 사람 수로 봐도, 시간으로 봐도. 근데 왜 교회는 기쁘게 하냐고요?"
L씨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교회에서는 제가 '봉사자'예요. 존중받죠.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들어요. 근데 시댁에서는요? '며느리 구실 했네' 한마디 듣고 끝이에요. 봉사자가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사람."
38세 M씨는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
"명절 음식 힘들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래요. '요즘 반조리 식품 많은데 뭐가 힘드냐'고. 근데 진짜 힘든 건 음식이 아니에요. 거기서 제가 투명인간 취급받는 게 힘든 거예요."
투명인간?
"일할 땐 보이는데, 밥 먹을 땐 안 보여요. 제사 지낼 땐 필요한데, 제사 끝나면 필요 없는 사람. 이게 노동이 힘든 거예요? 존재가 부정당하는 게 힘든 거죠."
진짜 이유
결국 명절 스트레스의 본질은 노동 강도가 아니다.
만약 음식 준비가 문제라면, 배달음식으로 해결될 것이다.
만약 시간이 문제라면, 준비 시간을 줄이면 될 것이다.
만약 피로가 문제라면, 충분히 쉬면 될 것이다.
하지만 H씨, I씨, J씨, K씨, L씨, M씨의 증언이 보여주듯, 아무리 노동을 줄여도 근본적인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누구인가?"
가족인가, 직원인가.
주인인가, 일꾼인가.
사람인가, 역할인가.
명절이라는 의례 안에서 며느리에게 부여되는 정체성. 그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숫자가 말하는 것
서울대 사회학과 2024년 연구에 따르면:
제사 준비 노동 시간: 평균 8.5시간
교회 주방 봉사 시간: 평균 6.2시간
제사 후 만족도: 2.1점 (5점 만점)
교회 봉사 후 만족도: 4.3점 (5점 만점)
같은 노동, 다른 의미.
차이는 노동 강도가 아니라 인정이었다.
지갈라타스의 말처럼, 의례는 참여자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제사라는 의례가 며느리에게 부여하는 정체성은 '일하는 사람',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 '며느리 구실을 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가족 구성원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봉사하는 외부인.
이것이 명절 음식 준비가 힘든 진짜 이유다.
노동이 아니라 인정.
시간이 아니라 존재.
피로가 아니라 정체성.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오늘도 이런 글이 올라온다.
"차라리 돈 주고 호텔에서 명절 보내고 싶어요."
이 말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음식 준비가 싫어서가 아니다.
그 자리에서 부여받는 정체성이 견딜 수 없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