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대신 예배를 선택한 여자들

3장 의례의 정치학

by 한시을

12회. 국가가 정한 종교, 종교가 바꾼 의례


같은 외래종교인데, 왜?

온라인 커뮤니티에 한 며느리가 글을 올렸다. "친정은 천주교 집안인데 명절마다 제사 지내요. 시댁은 개신교인데 제사는 절대 안 된대요. 같은 기독교인데 왜 이렇게 다른가요?" 댓글이 수십 개 달렸다. "우리 집도 그래요." "시어머니는 천주교인데 제사 잘 지내시던데요." "교회 목사님은 제사가 우상숭배래요."

38세 B씨는 이 차이가 늘 궁금했다. "시댁은 3대째 개신교 집안이에요. 시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우리 어머니 때부터 제사 안 지냈다. 교회에서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근데 제 친구는 천주교 신자인데 친정 제사 잘 지내요. 왜 이렇게 다를까요?"

42세 C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명절 전날 되면 우리 교회에서 기도회 공지가 떠요. '제사 대신 교회 오세요'라고. 근데 옆집 천주교 신자 언니는 제사 지낸다고 고향 내려가요. 처음엔 이상했는데, 지금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해요."

이 차이는 어디서 왔을까? 왜 같은 기독교인데 천주교는 제사를 허용하고 개신교는 금지하는가? 그 답의 실마리는 1939년 로마에서 시작된다.


1939년, 로마에서 내려온 결정

1939년 12월 8일, 로마 교황청에서 한 문장이 내려왔다. "조상제사는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시민적 예식이다." 교황 비오 12세가 공포한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의 핵심이었다. 천주교는 처음 한국에 들어올 때부터 조상제사를 엄격히 금지했었다. 1791년 진산사건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이후,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했다. "무군무부(無君無夫)", 즉 임금도 없고 아버지도 없는 사악한 종교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런데 148년 만에 교황청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 제사는 이제 우상숭배가 아니었다. 미신도 아니었다. 시민적 예식, 즉 한 사회의 풍속일 뿐이었다. 같은 해 8월, 당시 경성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는 조선신궁에서 매달 신사참배를 시작했다. 3년 전인 1936년 5월 26일, 교황청은 이미 일본의 신사참배를 허용한 바 있었다.

이 결정은 극동 아시아의 신자들을 위한 선물이 아니었다. 군국주의를 앞세운 일본 제국의 압력에 교황청이 굴복한 것이었다. 1930년대 후반,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득세하고 있었다. 바티칸은 1929년 무솔리니와 라테란 조약을 맺었고, 1937년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방공협정 체결로 일본과 우방이 되었다. 공산주의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교황청은 일본 제국과 손을 잡았고, 그 대가로 제사와 신사참배를 허용했다.

1940년 7월, 조선 8교구 주교들은 공동 교서를 발표했다. "교회의 신앙 도리가 변했다고 결코 생각하지 말라. 다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상제사에 대한 현대인의 정신이 변했기 때문에 용납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알고 있었다. 신앙의 도리가 변한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의 힘 앞에서 교회가 무릎 꿇은 것임을.


국가가 의례를 장악할 때

일제는 1915년부터 조선에 신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을 필두로, 1936년 '1면 1신사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1945년까지 전국에 1,141개의 신사와 신사(神祠)가 건립되었다. 산간벽지까지 신사가 들어섰다.

1936년 8월,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는 '황민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관동군사령관 출신인 그의 목표는 명확했다.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 그리고 그 수단은 신사참배였다.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여 조선인을 '충량한 제국 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학교는 물론 교회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기독교계는 처음에는 거부했다. "우상숭배"라며 강력히 맞섰다. 평양의 숭실학교와 숭의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1938년 폐교를 선택했다.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목회자들이 투옥되었고, 50명이 옥사했다. 2,000여 명의 목사와 기독교인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천주교가 먼저 무너졌다. 1936년 5월, 로마 교황청의 허용령에 따라 천주교가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 감리교회도 1936년 백기를 들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장로교회도 결국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일본 경찰들이 대놓고 감시하는 가운데, 총회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총회는 결의 직후 회의를 중단하고, 평양신사로 향했다.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를 섬기는 사당 앞에서, 조선 교회 지도자들은 무릎을 꿇었다. 국가가 의례를 장악한 순간이었다.

50대 D씨는 이 이야기를 교회에서 들었다. "목사님이 설교 중에 그때 얘기를 하셨어요. '우리 선배 목사님들이 순교하셨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옥사하셨다.' 그 얘기 들으면서 생각했어요. 지금 우리는 어떤가? 우리도 뭔가에 굴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해방 이후, 교회와 국가의 새로운 결합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마자 조선인들은 전국의 신사를 불태웠다. 신사참배에 대한 반감이 그만큼 강했다. 하지만 신사참배에 협력했던 교회 지도자들은 대부분 살아남았다. 일부는 회개했지만, 많은 이들은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자리를 유지했다.

분단과 전쟁은 한국 교회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북한에서 내려온 기독교인들이 남한 교회의 핵심이 되었고, 반공은 교회의 정체성이 되었다. 공산주의는 악이었고, 기독교는 자유 진영의 대표였다. 교회는 국가와 다시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일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였다.

1960년대부터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60년 5,011개였던 교회는 1970년 12,866개, 1980년에는 21,243개로 늘어났다. 불과 20년 만에 네 배 이상 증가했다. 신자 수는 더 놀라웠다. 1965년 약 120만 명이던 개신교 신자는 1975년 350만 명, 1990년에는 800만 명에 육박했다.

이 성장의 배경에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있었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은 소외감과 정체성의 위기를 느꼈다. 교회는 그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했다. 새마을운동이 "잘 살아 보세"를 외칠 때, 교회는 "3박자 축복"을 선포했다. 영혼 구원, 육체 건강, 물질적 풍요. 기독교를 믿으면 서양식으로 잘 살 수 있다는 인식이 퍼졌다. 근대화와 기복신앙이 결합했다.

55세 E씨는 그 시절을 기억한다. "우리 어머니가 1970년대에 교회 다니기 시작하셨어요.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힘드실 때였죠. 교회 가면 잘 산다고 믿으셨어요. 실제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옷도 잘 입고 잘 사는 것처럼 보였대요. 어머니는 '교회 가니까 마음이 편하다'고 하셨지만, 솔직히 '잘 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 성장을 뒷받침한 것은 국가와 교회의 유착이었다.


군사정권이 축복받는 조찬기도회

1980년 8월,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전두환이 군부를 동원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정권을 탈취한 지 석 달도 안 된 시점이었다. 5월 18일, 광주에서 시민들이 학살당한 지 불과 석 달 만이었다.

이 기도회에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전두환 위원장을 축복했다. 기도회는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목사들은 마이크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 나라를 공산주의로부터 지켜주시고, 새로운 지도자를 축복하소서." 전두환은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받았다.

이것은 신사참배와 얼마나 달랐을까? 형식은 달랐다. 일제는 강요했고, 군사정권은 "자발적" 협력을 받았다. 하지만 구조는 같았다. 국가 권력이 종교를 이용했고, 종교는 그 대가로 성장의 기회를 얻었다. 의례는 다시 국가의 도구가 되었다.

대통령 조찬기도회는 이후 전통이 되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이 의례에 참석했다. 교회는 정치권력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했고, 정치인들은 교회의 조직력을 이용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은 군사독재정권을 지지하고 옹호했다. 일부 진보적 교회들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지만, 주류는 권력과 함께했다.

43세 F씨는 이 장면을 TV에서 본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때 뉴스에서 봤어요. 대통령이 교회 목사님들이랑 기도하는 거. 지금도 그런 거 하잖아요. 대통령 조찬기도회. 우리 교회 목사님도 가신 적 있대요.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기도인가, 정치인가."


삼각구조의 완성

일제강점기, 국가(일제)는 의례(신사참배)를 통해 종교를 장악하려 했다. 천주교는 교황청의 명령에 따라 굴복했고, 개신교도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그 과정에서 가족의 의례(제사)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조상을 섬기는 제사는 "시민적 예식"으로 격하되었고, 신사참배는 "국민의 의무"로 승격되었다.

해방 이후, 이 구조는 형태를 바꿔 지속되었다. 국가(군사정권)는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종교(교회)와 결합했다. 교회는 급성장의 기회를 얻었고, 그 대가로 정권을 축복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다시 가족의 의례(제사)는 밀려났다. 교회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며 거부했고, 며느리들은 "교회 가야 해서"라는 핑계로 제사를 피할 수 있었다.

국가-종교-가족. 이 삼각구조 안에서 가장 약한 고리는 항상 가족이었다. 국가가 종교를 이용할 때, 가족의 의례는 희생되었다. 종교가 국가와 결합할 때, 전통 의례는 폄하되었다. 며느리들이 제사를 떠나 교회로 향한 것은, 이 거대한 구조의 한 결과였다.

1939년 로마에서 내려온 한 문장은, 단순히 제사를 허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권력이 종교적 정당성을 어떻게 조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148년간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거부했던 제사가, 국제정치의 필요에 따라 하루아침에 "시민적 예식"이 되었다. 신앙의 본질이 변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필요가 바뀐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해방 이후에도 같은 길을 걸었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순교했던 그 교회가, 불과 30년 뒤에는 군사독재를 축복하고 있었다. 의례는 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권력과의 거래가 되었다.


의례 전쟁의 피해자들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옥사한 목사들과 그 가족들. 해방 이후, 교회와 제사 사이에서 갈등하며 가족이 분열된 며느리들. 정치와 종교의 결합을 비판하다가 "빨갱이"로 몰린 양심적 기독교인들.

국가와 종교가 의례를 두고 벌인 전쟁에서, 개인의 양심과 가족의 평화는 늘 부차적인 것이었다. 일제는 천황 숭배를 강요했고, 교황청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신앙을 거래했으며, 군사정권은 교회의 축복을 받아 독재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교회는 성장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위해 권력과 손을 잡았다.

1990년대 중반, 한국 교회의 성장은 멈췄다. 1995년 개신교 신자 수가 870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교회는 감소세로 돌아섰다. 왜 성장이 멈췄을까? 경제 성장, 민주화, 교회 내부의 부패 등 여러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권력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의례가 얼마나 쉽게 정치의 도구가 되는지를. 그리고 신앙이 성장과 물질적 축복을 약속할 때, 그것이 전통 종교의 기복신앙과 얼마나 다르지 않은지를.


며느리들이 물려받은 구조

국가가 의례를 정할 때, 종교는 무엇을 잃는가? 1939년 교황청의 결정은 천주교 신자들의 생명을 구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148년간 순교자들이 지켜온 신앙의 순수성을 포기한 것이기도 했다.

종교가 국가와 결합할 때, 의례는 무엇이 되는가? 1980년 조찬기도회에서 전두환을 축복한 기도는 진정한 기도였을까, 아니면 정치적 제스처였을까? 광주에서 희생된 시민들 앞에서, 그 기도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리고 가족은? 국가와 종교가 의례를 두고 싸울 때, 가족의 의례는 늘 희생되었다. 제사는 한때 우상숭배로 금지되었다가, 시민적 예식으로 허용되었다가, 다시 미신으로 폄하되었다. 이 모든 변화 속에서, 정작 제사를 지내야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며느리들이 제사를 떠나 교회로 향한 것은, 단순히 신앙의 선택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와 종교가 만들어낸 거대한 구조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를 고른 것이었다. 제사는 그들을 일꾼으로만 대우했고, 교회는 그들을 권사님으로 불러주었다. 제사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고, 교회는 천국을 약속했다.

42세 C씨는 말한다. "어머니 세대는 교회 가면 잘 산다고 믿었어요. 우리 세대는 그런 거 안 믿어요. 근데 그래도 교회 가요. 왜냐하면 제사는 더 싫거든요. 교회는 적어도 나를 사람으로 대해줘요. 제사는 나를 일꾼으로 봐요. 선택이 아니라 강요예요."

38세 B씨는 더 직접적이다. "이게 진짜 자유로운 선택이었을까요? 국가가 종교를 이용하고, 종교가 국가와 결탁하고, 그 사이에서 가족은 무너지고.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당한 거 아닌가요? 제사 아니면 교회. 둘 다 싫은데 하나는 골라야 하는 거. 이게 선택인가요?"

하지만 이 선택이 과연 자유로운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국가와 종교가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의 강제된 선택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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