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주권에 대한 도전 - 해방과 분단, 그리고 권력 엘리트의 시대
▌"제주도민들이 전부 빨갱이라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니라, 무고한 민중들이 이념의 제물이 됐던 것이다" - 제주 4·3 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종합보고서(2003)
여러분! 여러분이 걷는 이 길은 그냥 길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길일까요? 따라가 봅시다.
제주공항에서 내려 렌터카를 빌려 드라이브를 떠나는 여러분. 첫 번째로 향하는 곳은 제주시 관덕정 광장일 겁니다. SNS에 올릴 인증샷을 찍기 위해서요. 그다음엔 한라산 등반로로 향해 힐링 트레킹을 즐기겠죠. 마지막엔 중산간 지역을 드라이브하며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에 감탄할 테고요.
하지만 여러분이 행복하게 걸었던 그 모든 길에서, 76년 전 무고한 주민 3만 명이 마지막 숨을 거뒀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즐겁게 걸어 다니는 이 평화로운 섬 전체가, 한때는 거대한 학살터였거든요.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까지. 분단 정부 수립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아니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도 제주도민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주 4·3 사건의 진실입니다.
관덕정 광장. 지금은 제주시 중심가의 대표적인 명소입니다. 조선 태종 때 세워진 관덕정을 중심으로 한 이곳에서 관광객들은 기념사진을 찍고, 주변 상점가에서 쇼핑을 즐깁니다.
하지만 1948년 이곳은 공개처형장이었어요. 군인과 경찰들이 '빨갱이'로 몰린 제주도민들을 이곳에서 총살했습니다. 구경하는 사람들 앞에서 말이죠.
당시 미군정 하에서 제주도 상황은 복잡했습니다. 1947년 3월 1일 기념식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단이 됐어요. 제주도민들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도민들이 '좌익'으로 몰렸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제주도 사람들은 전부 빨갱이다. 2~3만 명 죽여버려야 한다." - 송요찬 제9연대장(1948.11)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경찰지서와 우익 인사들을 습격하면서 4·3 사건이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정작 무장대는 350명 정도에 불과했어요. 문제는 이후 토벌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대거 희생된 것이었습니다.
관덕정 광장에서 벌어진 공개처형은 도민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어요. "저항하면 저렇게 된다"는 경고였죠. 하지만 실제로 처형당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무장대와 아무 관련 없는 평범한 농민들이었습니다.
한라산. 지금은 연간 수십만 명이 찾는 대한민국 최고의 등반 명소입니다. 성판악 코스, 관음사 코스, 어리목 코스... 등반객들은 자신의 체력에 맞는 코스를 선택해 한라산의 절경을 만끽합니다.
하지만 1948년 한라산은 제주도민들에게 마지막 피난처이자 죽음의 산이었어요. 토벌대의 공격을 피해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한라산으로 피신했지만, 토벌대는 이들을 무장대로 간주하고 색출 작전을 벌였습니다.
특히 1948년 11월부터 시행된 '소개령'은 참혹했습니다. 중산간 지역 마을 주민들을 해안가로 강제 이주시키고, 중산간에 남아있는 사람은 무조건 무장대로 간주해 사살하겠다는 명령이었어요.
▌[당시의 목소리] "중산간 지대는 무인지대로 만들어라. 거기서 발견되는 자는 모조리 무장대로 간주하고 총살하라." - 제9연대 작전명령(1948.11)
이때부터 한라산은 거대한 무덤이 됐습니다. 소개령을 따라 짐을 싸고 내려가던 주민들도, 끝까지 고향을 지키려던 주민들도, 모두 '빨갱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했어요. 한라산 곳곳에 은신해 있던 가족들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하나둘 죽어갔습니다.
지금도 한라산 등반로 곳곳에는 당시 희생자들의 유해가 묻혀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등반객들이 힐링을 위해 걷는 그 길 아래에 76년 전의 한이 서려있는 거죠.
제주 중산간 지역. 지금은 아름다운 목장과 카페들이 늘어선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입니다. 푸른 초원과 말들이 뛰노는 평화로운 풍경에 관광객들은 감탄사를 연발하죠.
하지만 이곳은 4·3 사건 당시 가장 참혹한 학살이 벌어진 현장이었어요. 중산간 지역 마을 170여 개가 완전히 불타 사라졌습니다. 주민들은 마을과 함께 재가 됐고요.
대표적인 곳이 북촌마을입니다. 1949년 1월 17일, 토벌대는 북촌마을 주민 400여 명을 한 곳에 모아놓고 총살했어요. 갓난아기부터 80세 노인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이 마을에 무장대가 숨어있다"는 의혹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무장대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거든요. 토벌대는 나중에 이를 알았지만, 이미 400명이 죽은 후였어요.
▌[당시의 목소리] "북촌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차별 총격이 가해져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 제주 4·3 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종합보고서(2003)
곤을동, 하귀마을, 모슬포... 지금은 관광지가 된 이 모든 곳들에서 집단학살이 벌어졌어요. 마을 전체가 사라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건, 이런 학살을 지휘한 사람들이 나중에 승진하고 포상을 받았다는 점이에요. 송요찬은 나중에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랐고, 함병선은 경찰청장이 됐습니다. 민간인 학살을 '공산세력 토벌 공로'로 인정받은 거죠.
제주 4·3 사건은 단순한 '좌우 대립'이 아니었어요. 분단 정부 수립 과정에서 민중의 주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시도였습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를 앞두고, 제주도에서는 선거 반대 움직임이 일어났어요. "분단 선거를 하면 통일이 불가능해진다"는 이유에서였죠. 하지만 이런 의견 표출 자체가 '빨갱이 짓'으로 몰렸습니다.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에게는 선거 성공이 절대 명제였어요. 그래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규정하고 제거하려 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파괴한 셈이죠.
더 근본적인 문제는 분단체제 자체였어요. 남북 분단이 기정사실화되면서, '반공'이 모든 것을 재단하는 기준이 됐습니다. 통일을 원하는 것도, 평화를 바라는 것도, 심지어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것도 모두 '빨갱이 짓'이 됐어요.
제주도민들은 이런 논리의 첫 번째 희생양이었습니다. 분단체제가 만들어내는 폭력의 원형을 보여준 사건이 바로 4·3이었거든요.
4·3 사건 후 제주도에는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4·3을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어요. 희생자 가족들조차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취직도, 진학도, 결혼도 어려웠거든요.
이런 침묵은 군부독재 시절 내내 계속됐어요. 4·3을 언급하는 순간 "북한을 찬양하는 불순분자"로 몰렸으니까요. 진실을 말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행위였습니다.
변화는 1987년 민주화 이후부터 시작됐어요. 시민사회와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문학과 예술을 통해 4·3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대표적이죠.
그리고 마침내 2000년 「제주 4·3 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어요. 52년 만에 4·3이 공식적으로 국가 폭력으로 인정받은 거였습니다.
2025년 현재, 제주 4·3 사건은 어떤 의미일까요? 단순히 "과거의 비극적 사건"일까요? 아니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일까요?
분단체제는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요. '종북'이라는 낙인찍기, 평화를 말하면 '빨갱이'로 몰아가는 구조,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배타성... 이 모든 것들이 4·3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더 심각한 건, 민중의 주권이 여전히 제한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 사회지만, 실제로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목소리가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구조 속에서 또 다른 '4·3'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도 있어요. 4·3의 진실이 밝혀지고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된 것처럼, 시민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부당한 권력에 맞설 수 있거든요. 촛불혁명이 그 증거였죠.
제주도를 여행할 때, 그 아름다운 풍경 뒤에 숨겨진 아픈 역사를 기억해 주세요. 그리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진정한 주권자로서 깨어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세요.
[다음 회 예고] 제2장 7화: "전쟁이 만든 국가: 한국전쟁과 친일 군부세력의 주체화 과정" - 한국전쟁이 어떻게 분단을 영구화시켰는지, 그리고 일제강점기 친일 군부세력이 어떻게 전쟁을 통해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재탄생했는지 탐구합니다.
[용어 해설]
제주 4·3 사건: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 약 3만 명이 희생됐다.
소개령: 1948년 11월 중산간 지역 주민들을 해안가로 강제 이주시키고, 중산간에 남은 사람은 무장대로 간주해 사살하겠다는 토벌대 명령.
북촌마을 학살: 1949년 1월 17일 제주 조천읍 북촌마을에서 토벌대가 주민 400여 명을 집단 학살한 사건. 4·3 사건 중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