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주권에 대한 도전 - 해방과 분단, 그리고 권력 엘리트의 시대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는 조선청년이 근대적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1963)
2025년 현재 대한민국 군부의 뿌리를 파헤쳐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군대의 핵심 간부들 상당수가 일제강점기 친일 군부 출신이었다는 점이죠.
국군 초대 총참모장 이응준? 일본 육사 출신. 2대 총참모장 정일권? 만주군관학교 출신. 3대 정순석? 일본 육사 출신. 심지어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도 만주군 장교였고, 전두환의 스승 격인 백선엽도 만주군 출신이었어요.
이들이 어떻게 일제강점기 '황군 장교'에서 '국군 장성'으로 화려하게 변신할 수 있었을까요? 그 비밀은 바로 한국전쟁에 있었습니다. 전쟁이 이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 거죠.
해방 직후 친일 군부들의 처지는 막막했습니다. 35년간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으니, 새로운 조선에서 설 자리가 없어 보였거든요.
1945년 해방 당시 조선에는 일본군 출신 조선인 장교가 수백 명 있었어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이나 만주 군에서 복무한 이들이었죠. 하지만 광복군이나 중국군에서 활동한 독립군 출신들과 달리, 이들은 완전히 찬밥 신세였습니다.
더구나 미군정도 처음에는 이들을 신뢰하지 않았어요. 일본군 출신들이 과연 새로운 민주 조선에 충성할 수 있을까 의심했거든요. 실제로 미군정은 초기에 독립군 출신들을 우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곧 뒤바뀌었어요. 1946년부터 시작된 좌우 대립, 그리고 소련과의 냉전이 격화되면서 미군정의 계산이 달라진 거죠. 이념보다는 '실용'을 택한 겁니다.
미군정이 직면한 딜레마는 명확했습니다. 항일 경력은 훌륭하지만 좌익 성향의 독립군 출신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친일 경력은 있지만 확실한 반공주의자인 일본군 출신을 택할 것인가?
1946년 10월 대구 항쟁을 계기로 미군정의 선택은 확실해졌어요. "반공이 항일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거죠. 이때부터 일본군 출신들이 하나둘 군 간부로 발탁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과거 일본군 경력보다는 현재의 반공 의지가 중요하다. 공산주의와의 투쟁에서는 경험 있는 군인이 필요하다." - 하지 미군정장관(1947.3)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국군이 창설되면서, 일본군 출신들의 등용이 본격화됐어요. 초대 국방부장관 이범석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고, 육군참모총장 이응준은 일본 육사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대령으로 특진된 8명을 보면 이런 경향이 명확히 드러나요. 만주군 출신 백선엽, 양국진, 김백일, 신학진, 박동균과 일본군 출신 유재흥이 포함됐습니다. 반면 광복군을 비롯한 독립군 출신은 극소수에 불과했어요.
이들의 등용 논리는 간단했어요. "경험 있는 군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정작 중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광복군 출신들은 "좌익 성향"이라는 이유로 배제됐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친일 군부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이제 과거의 친일 행적을 '반공 투쟁'으로 덮어버릴 수 있게 된 거죠.
전쟁 초기 국군의 무기력한 패배 속에서도, 일본군 출신들은 오히려 빛을 발했어요. 실전 경험이 있었거든요. 백선엽의 1사단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보여준 활약이 대표적입니다.
백선엽은 원래 만주 군에서 팔로군(중국 공산군)과 싸웠던 경험이 있었어요. 그 경험이 한국전쟁에서 빛을 발한 거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만주에서 싸운 상대는 일제에 맞선 항일무장투쟁 세력이었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이 낙동강에서 보여준 용맹은 국군의 자랑이다. 그의 풍부한 실전 경험이 조국을 구했다." - 『동아일보』(1950.8.15)
전쟁이 계속되면서 일본군 출신들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어요. 이들은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의 친일 행적은 묻히고, 현재의 반공 투쟁만 부각된 거죠.
한국전쟁은 단순히 친일파들의 명예회복 기회만 제공한 게 아니었어요. 군부 전체의 사회적 지위를 급격히 끌어올렸습니다.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군대는 그저 하나의 국가기구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전쟁을 거치면서 군부는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됐죠. 정치적 발언권도 크게 늘어났고요.
더 중요한 건 미군과의 긴밀한 협력 관계였습니다. 전쟁 중 한미 군사협력이 강화되면서, 한국 군부는 미국의 강력한 후원을 받게 됐어요. 이는 나중에 군부가 정치에 개입할 때 든든한 배경이 됐습니다.
전쟁 중 급속한 군 확장도 친일 군부들에게 유리했어요. 전쟁 발발 당시 10만 명이던 국군이 1953년에는 60만 명으로 늘어났거든요. 이 과정에서 간부가 대거 필요했는데, 경험 있는 일본군 출신들이 대거 충원된 거죠.
한국전쟁 중 가장 극적인 변신을 보여준 인물이 박정희였어요. 그는 1948년 여순사건에 연루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인물이었거든요. 하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전형적인 친일 엘리트였어요. 만주 군에서는 다케무라 마사오(武村正雄)라는 일본 이름을 쓰며 8년간 복무했습니다. 심지어 혈서까지 써가며 일본에 충성을 맹세했었죠.
하지만 해방 후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해 좌익 활동을 했어요. 그러다 1948년 발각돼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전향'을 조건으로 석방됐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박정희 소령은 완전히 전향했으며, 반공 투쟁에 투신할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의 군사적 재능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 백선엽 준장 건의서(1950.9)
전쟁 중 박정희는 정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어요. 특히 부산 피난 시절 정보참모부에서 활약하며 군 고위층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이때의 인맥이 나중에 5.16 쿠데타의 기반이 됐죠.
박정희의 경우처럼, 전쟁은 친일파들에게 완전한 '신분 세탁'의 기회를 제공했어요. 이제 이들은 과거를 추궁당하지 않고, 오히려 "경험 많은 애국자"로 대접받게 됐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권력구조는 완전히 바뀌었어요. 해방 직후 잠시 주목받았던 독립운동 세력은 완전히 주변화됐고, 대신 친일 출신 군부와 관료들이 권력의 핵심을 차지했습니다.
이들의 권력 장악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뤄졌어요. 냉전 논리에 따라 "반공이 정의"가 된 상황에서, 과거의 친일 행적은 오히려 "반공 경력"으로 둔갑했거든요.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구조가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점입니다. 권력을 잡은 친일 출신들은 자신들의 과거가 문제시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어요. 그래서 과거사 청산을 철저히 방해했고, 민주적 견제 세력의 성장도 억압했습니다.
한국전쟁은 분단을 고착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친일파 청산 실패를 영구화했어요. "반공이 최고 가치"인 상황에서는 친일파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좌익"으로 몰렸거든요.
전쟁 이후 군부 내에는 강력한 일본군 출신 네트워크가 형성됐어요. 이들은 일본 육사나 만주군관학교 출신이라는 공통분모로 묶여있었죠.
박정희, 백선엽, 정일권, 김종오, 장도영... 이들은 모두 일본군 출신이면서 한국 현대사의 핵심 인물들이었어요.
특히 박정희 주변에는 만주군관학교나 일본 육사 출신들이 포진했어요. 이들 사이의 인맥과 신뢰관계가 나중에 5.16 쿠데타의 기반이 됐습니다.
이런 네트워크는 단순히 인맥 차원을 넘어 이데올로기적 공통분모도 가지고 있었어요. 권위주의적 사고, 민중에 대한 불신, 개발독재 이념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2025년 현재에도 이때 형성된 구조의 잔재가 남아있어요. 군부 내 권위주의 문화, 민간에 대한 우월감, 과거사에 대한 회피 등이 그 흔적들이죠.
더 심각한 건, 친일파 청산 실패가 현재까지도 정치적 갈등의 뿌리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에서도 이 문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거든요.
한국전쟁이 만들어낸 "반공 이데올로기의 절대화"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평화를 말하면 "종북"으로 몰리고, 과거사를 거론하면 "좌익"으로 매도당하는 구조가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도 있어요. 군부독재가 끝나고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과거사에 대한 진실 규명도 조금씩 이뤄지고 있거든요. 비록 늦었지만, 진실은 결국 밝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런 역사를 기억하고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에요. 전쟁이나 위기 상황을 이용해 기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깨어있어야 합니다.
[다음 회 예고] 제2장 8화: "첫 번째 도전: 5.16 쿠데타와 박정희 체제의 등장" - 친일 출신 군부가 어떻게 "조국 근대화"를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했는지, 그리고 이것이 왜 민중 주권에 대한 첫 번째 도전이었는지 탐구합니다.
[용어 해설]
만주군관학교: 일제가 만주국에 설치한 군사학교. 박정희, 백선엽 등 한국 군부 핵심 인물들의 출신 학교였다.
여순사건: 1948년 10월 여수·순천에서 발생한 군인 반란 사건.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한 14 연대가 봉기했으나 진압됐다.
일본군 출신 네트워크: 한국전쟁 이후 군부 내에 형성된 일본 육사나 만주군 출신들의 인맥.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의 기반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