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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을의 역사 09화

을의 역사

제2장: 주권에 대한 도전

by 한시을

8화 첫 번째 도전: 5.16 쿠데타와 박정희 체제의 등장


▌"4.19 혁명으로 민주주의가 우리나라에 왔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도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 박정희, 1961년 5월 쿠데타 직후 기자회견


2025년 현재 대한민국을 돌아보면 참 아이러니한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경제는 세계 10위권이고, K-문화는 전 세계를 휩쓸고 있지만, 정치는 여전히 권위주의적 유산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특히 대통령제 하에서 나타나는 제왕적 권력, 관료들의 권위주의적 행태, 시민을 무시하는 국정 운영... 이런 모습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1961년 5월 16일로 수렴됩니다.


그날 새벽, 친일 출신 장교 박정희가 이끈 군부 쿠데타는 단순히 정권 교체가 아니었어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의 주권에 정면 도전한 사건이었습니다. 해방 후 16년 만에 '을'들이 스스로 선택한 민주정부를 군부가 총칼로 무너뜨린 거죠.


4.19가 열어젖힌 민주주의의 가능성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이승만의 독재에 맞선 시민 혁명이었어요. 부정선거에 분노한 학생들의 함성이 전국을 뒤덮었고, 결국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4.19 혁명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시민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이었어요. 해방 후 줄곧 친일 기득권 세력과 권위주의 정치인들에게 휘둘렸던 민중들이 비로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 거였죠.


[당시의 목소리] "우리는 학생이기 이전에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시민이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나섰다." - 1960년 4월 학생시위 선언문


1960년 8월 출범한 장면 정부는 비록 혼란스러웠지만, 분명 희망이 있었어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됐고, 노동운동이 활발해졌으며, 통일 논의도 자유롭게 이뤄졌습니다. 특히 남북 교류에 대한 사회적 열망이 높아지면서, 분단 체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이런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기득권을 누려왔던 친일 출신 군부와 보수 엘리트들이었죠.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존재였어요.


박정희, 기회를 엿보다


바로 이때 박정희가 등장했습니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그는 해방 후 좌익 활동으로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한국전쟁을 계기로 군에 복귀한 인물이었어요.


박정희는 1950년대 내내 군부 내에서 입지를 다져왔습니다. 정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만주군 출신들과의 인맥을 활용해 세력을 확장했죠. 특히 김종필과 같은 후배들을 규합해 나름의 조직을 만들어갔어요.


4.19 혁명이 터지자 박정희는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의 애매한 태도가 쿠데타의 가능성을 열어준 거였죠.


박정희가 쿠데타를 결심한 결정적 계기는 장면 정부의 군 감축 계획이었어요. 1961년 3월 장면 총리는 군 병력을 60만 명에서 40만 명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군부 엘리트들에게는 생존의 위기로 받아들여졌어요.


1961년 5월 16일 새벽, 역사의 분수령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박정희가 이끄는 군사혁명위원회 소속 군인들이 한강대교를 건넜습니다. 쿠데타가 시작된 거죠.


군인들은 중앙청(현 광화문), 방송국, 통신시설을 장악했어요. 라디오에서는 "군사혁명위원회"의 성명이 방송됐습니다. 내용은 간단했어요. "부패한 정치인들을 몰아내고 조국을 구하겠다"는 것이었죠.


[당시의 목소리] "우리는 국가와 민족과 반공자유의 대의에 투신하여 정의로운 군사혁명을 단행한다" - 군사혁명위원회 성명 제1호(1961.5.16)


하지만 쿠데타 초기에는 혼란이 많았어요. 박정희가 주도한 쿠데타라 군 수뇌부의 반발이 컸거든요. 특히 미군 역시 초기에는 쿠데타에 반대 입장을 보였습니다.


결정적 전환점은 미국의 태도 변화였어요. 케네디 행정부는 처음에는 쿠데타를 비판했지만, 곧 현실적 판단을 내렸습니다. "반공 성향의 강력한 정부"가 혼란스러운 민주정부보다 낫다고 본 거죠.


반공을 앞세운 민주주의 파괴


박정희 쿠데타의 가장 교묘한 점은 '반공'을 명분으로 내세웠다는 겁니다. 장면 정부 시기 활발해진 통일 논의와 좌익 활동을 '빨갱이 준동'으로 몰아갔어요.


실제로 1960-61년 시기에는 사회주의 활동이 어느 정도 활발해진 것이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공존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거든요.


하지만 박정희는 이를 "국가 위기"로 포장했어요. 그리고 "강력한 반공정부"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냉전 논리에 익숙한 미국도 결국 이런 논리에 설득당했죠.


[당시의 목소리] "공산주의가 침투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자유민주주의보다 강력한 반공체제가 우선이다" - 박정희, 1961년 미군 관계자와의 면담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치인들을 숙청하는 것이었어요. 4.19 혁명으로 등장한 민주 세력들을 '부패 정치인'으로 몰아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더 심각한 건 시민사회에 대한 탄압이었어요. 노동조합은 해산당했고, 학생운동은 금지됐으며, 언론은 검열을 받게 됐습니다. 4.19가 열어젖힌 민주주의의 공간이 하루아침에 닫혀버린 거죠.


경제개발을 앞세운 권위주의의 정당화


박정희가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은 경제개발이었어요.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분명 성과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완전히 희생됐죠.


박정희 정권의 논리는 간단했어요. "먹고살기도 힘든데 민주주의가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선 성장, 후 분배' 논리였죠. 하지만 이는 완전한 거짓말이었어요.


진짜 목적은 권력 유지였습니다. 경제성장을 명분으로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게 집중시켰고, 국민들을 경제 성장의 부품으로 전락시켰어요. 국민은 정치에 관심을 갖지 말고 오직 경제 건설에만 매달리라는 거였죠.


이 과정에서 재벌이 탄생했고, 정경유착이 구조화됐습니다. 박정희는 정치적 충성도에 따라 기업에 특혜를 줬고, 기업들은 정치 자금으로 보답했어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정경유착의 뿌리가 바로 이때 만들어진 거입니다.


친일파의 완전한 복권


5.16 쿠데타는 친일파들에게는 완전한 해방이었어요. 해방 후 20년간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이들이 당당하게 전면에 나설 수 있게 된 거죠.


박정희 자신이 대표적인 친일파였으니까요. 만주군에서 혈서까지 쓰며 일본에 충성했던 그가 이제는 "조국 근대화"의 영웅으로 포장됐습니다. 과거의 친일 행적은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현재의 권위주의는 "조국 발전을 위한 희생"이라고 둔갑했어요.


박정희 정권 하에서 일제강점기 관료나 기업인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대거 복귀했습니다. 이들은 박정희 정권의 핵심 세력이 됐고, 경제개발의 주역으로 활약했어요. 친일 청산은 완전히 물 건너간 거죠.


권위주의 DNA의 이식


박정희 쿠데타의 가장 심각한 후유증은 권위주의 문화의 확산이었어요. 박정희는 일본군 출신답게 상명하복의 군대식 문화를 사회 전반에 이식했습니다.


대통령은 절대권력자가 됐고, 관료들은 대통령의 부하가 됐으며, 국민들은 정부 정책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존재가 됐어요. "지시하면 복종"이 사회 전체의 원리가 된 거죠.


이런 문화는 기업에도 그대로 이식됐어요. 회장은 절대권력자, 임원들은 충성 경쟁, 직원들은 무조건 복종. 지금도 한국 기업 문화에 남아있는 권위주의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육 현장도 마찬가지였어요. 교사는 절대권위, 학생은 무조건 복종. 창의성이나 비판적 사고보다는 암기와 순종이 미덕이 됐습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문화가 한국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거죠.


주권에 대한 첫 번째 도전의 의미


5.16 쿠데타를 "주권에 대한 첫 번째 도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해방 후 처음으로 시민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민주정부를 군부가 무력으로 전복했기 때문이죠.


4.19 혁명은 한국 현대사상 최초의 시민혁명이었어요. 시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정부를 세운 거였습니다. 비록 1년밖에 지속되지 못했지만, 이는 진정한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어요.


하지만 5.16 쿠데타는 이런 시민 주권을 정면으로 부정했습니다. "국민들은 정치를 모르니 우리가 대신 다스리겠다"는 논리였죠. 이는 민주주의 원리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었어요.


더 심각한 건, 이런 논리가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경제성장과 안정을 원했던 많은 국민들이 박정희의 권위주의를 받아들였어요. "민주주의보다는 경제발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확산된 거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5.16의 그림자


2025년 현재에도 5.16의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어요. 강력한 대통령제, 관료들의 권위주의, 경제성장 우선주의, 시민사회에 대한 불신... 이 모든 것들이 박정희 시대의 유산입니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갈망하는 심리는 여전해요. 민주적 절차보다는 빠른 결정과 강력한 실행을 선호하는 문화가 남아있거든요. 이는 박정희 시대에 형성된 권위주의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경제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정경유착, 재벌 특혜, 노동자 희생을 당연시하는 문화는 모두 박정희 시대에 뿌리를 둡니다. "기업이 잘되면 국가가 잘된다"는 논리도 그때부터 시작된 거죠.


하지만 희망도 있어요. 1987년 민주화 이후 시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은 꾸준히 성장해 왔습니다. 촛불혁명이 그 증거였죠. 시민들이 다시 한번 자신들의 주권을 되찾은 거였어요.


중요한 건 5.16의 교훈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한 번 무너지면 되찾기 어려워요. 그리고 경제발전이나 안보를 명분으로 한 권위주의는 결국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 회 예고] 제2장 9화: "베트남 파병과 3선 개헌: 군부 권위주의의 심화와 주권의 후퇴" - 박정희 정권이 어떻게 베트남 전쟁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했는지, 그리고 3선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한 과정을 탐구합니다.


[용어 해설]

5.16 군사쿠데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주도한 군사쿠데타. 4.19 혁명으로 수립된 장면 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하고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군사혁명위원회: 5.16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 조직. 박정희, 김종필 등이 핵심 인물이었으며, 나중에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됐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62년부터 시작된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 계획. 수출주도형 경제발전을 추진했으나 권위주의 정치의 정당화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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