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주권에 대한 도전
▌"베트남에 가는 것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 - 박정희, 1964년 베트남 파병 결정 발표
2025년 현재 한국의 해외 파병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 참 복잡한 감정이 듭니다.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이나 대테러 작전 참여 때마다 "과연 우리가 가야 하나?"는 의문이 제기되거든요.
하지만 60년 전에는 이런 논쟁 자체가 불가능했어요. 1964년 박정희가 베트남 파병을 결정했을 때, 국회에서는 제대로 된 토론도 없었고, 시민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대통령이 "간다"라고 하니까 갔어요.
당시 한국이 베트남에 보낸 병력은 총 32만 명. 미국 다음으로 많은 규모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베트남이 한국에 무슨 위협을 가했나요? 전혀 없었어요. 그럼에도 8년간 5,000여 명의 젊은이들이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왜 박정희는 베트남에 가야 한다고 했을까요? 그리고 이 결정이 한국의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1964년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거부했어요. 영국, 프랑스 같은 주요 동맹국들도 "우리와 상관없는 전쟁"이라며 참여를 거부했죠.
그런데 박정희는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1964년 9월 의료진과 태권도 교관 등 130명을 먼저 보내더니, 1965년에는 2,000명의 전투부대(맹호부대)를 파견했어요. 1966년에는 4,500명의 백마부대까지 추가로 보냈습니다.
박정희의 계산은 명확했어요. 첫째, 미국과의 관계 강화. 둘째, 경제적 실익. 셋째,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 넷째, 군부 권력 공고화. 이 네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젊은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거였죠.
▌[당시의 목소리] "한국의 베트남 파병은 한미동맹 강화와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성전이다" - 정일권 국무총리, 1965년 국정감사
미국도 박정희의 적극성을 환영했어요. 다른 동맹국들이 모두 거부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파병은 고마운 일이었거든요. 그 대가로 미국은 한국에 막대한 군사원조와 경제지원을 약속했습니다.
베트남 파병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어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이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총 10억 달러. 당시 한국의 1년 국가예산과 맞먹는 규모였습니다.
이 돈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첫째, 미군과 한국군에 대한 군수지원 계약. 둘째, 베트남 건설 사업 참여. 셋째, 파병 장병들의 월급과 수당. 이 모든 것이 달러로 지급됐어요.
특히 현대건설, 대우건설 등이 베트남 건설 시장에서 큰돈을 벌었습니다. 정주영의 현대그룹이 오늘날의 재벌로 성장한 것도 베트남 특수와 무관하지 않아요. 박정희 정권과 친밀했던 기업들이 베트남에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거죠.
▌[당시의 목소리] "베트남 건설 사업으로 우리 기업들이 국제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이는 조국 근대화의 소중한 밑거름이다" - 박정희, 1968년 신년사
하지만 이런 경제적 실익이 과연 정당한 것이었을까요? 젊은이들의 목숨과 바꾼 돈이었거든요. 더구나 베트남 민간인들의 피해는 계산에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박정희에게 베트남 파병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절호의 기회였어요. "베트남에서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성전"으로 포장했거든요.
1960년대 중반 한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 열기로 뜨거웠어요. 신문과 방송은 연일 "용맹한 한국군의 활약상"을 보도했고, 학교에서는 "베트남의 자유를 지키는 우리 군대"를 자랑스러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반전 의식이나 평화 운동은 설 자리가 없었어요. 베트남 파병에 반대하는 것 자체가 "빨갱이 짓"으로 몰렸거든요. 심지어 대학생들도 "반공 의식"을 내면화하며 파병을 지지했습니다.
더 심각한 건 이런 분위기가 국내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에요. "국가 위기 상황"을 명분으로 정치적 반대 세력을 억압하기가 쉬워진 거죠. "외부의 적과 싸우는데 내부에서 분열하면 안 된다"는 논리였어요.
베트남 파병은 박정희 정권의 군사적 기반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전쟁을 통해 군부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졌고, 군사비 증액도 정당화됐어요.
특히 베트남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장교들이 나중에 한국 군부의 핵심이 됐습니다. 이들은 박정희에 대한 개인적 충성도가 높았고, 권위주의적 사고에 익숙했어요. 전두환, 노태우 등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들도 상당수가 베트남 파병 경험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전쟁 상황을 이용해 국내 통제도 강화됐어요. "전시 상황"을 명분으로 집회와 시위를 금지했고, 언론 검열도 더욱 심해졌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아들들을 위해 후방에서는 단결해야 한다"는 논리였죠.
1969년 박정희는 더 노골적인 주권 침해를 시도했습니다. 바로 3선 개헌이었어요. 헌법을 바꿔서 자신이 세 번째 대통령이 될 수 있게 만든 거죠.
당시 헌법상 대통령은 연임만 가능했어요. 박정희는 1963년과 1967년 두 번 당선됐으니, 1971년에는 출마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어요.
3선 개헌 추진 과정은 완전한 독재였습니다. 1969년 7월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강행 처리됐어요. 야당 의원들이 퇴장한 사이에 여당 의원들만으로 의결한 거였죠.
▌[당시의 목소리]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경험 있는 지도자가 계속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 3선 개헌은 국민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 박정희, 1969년 3선 개헌 지지 연설
국민투표도 완전한 관제였어요. 1969년 10월 17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찬성 65.1%, 반대 34.9%로 통과됐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조작된 결과였습니다. 정부 기관과 관변 단체들이 총동원돼 찬성표를 강요했거든요.
하지만 3선 개헌 과정에서 시민들의 저항도 시작됐어요. 특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반대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69년 6월 서울대를 시작으로 전국 대학에서 3선 개헌 반대 시위가 벌어졌어요.
정부는 강경하게 진압했습니다. 최루탄과 곤봉으로 학생들을 때려눕혔고, 주동자들은 구속시켰어요. 심지어 대학에 휴교령을 내려 학생들의 집회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언론도 저항했어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신문들이 3선 개헌 반대 논조를 폈죠. 하지만 정부는 광고 중단 압력과 세무 감사 등으로 언론을 압박했습니다.
종교계도 마찬가지였어요. 가톨릭과 개신교 지도자들이 3선 개헌 반대 성명을 발표했지만, 정부는 이들을 "정치에 개입하는 불순한 세력"으로 몰아갔어요.
3선 개헌 성공은 박정희에게 더 큰 야욕을 불러일으켰어요. "국민들이 나를 원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 거죠. 하지만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에게 95만 표 차이로 겨우 승리하자, 박정희는 더 확실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가 1972년 유신헌법이었어요. 3선 개헌은 유신체제의 예행연습이었던 셈이죠. 국민의 저항을 무력으로 누르고, 헌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방법을 학습한 거였어요.
베트남 파병도 유신체제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전쟁을 통해 강화된 군부 권력과 반공 이데올로기가 유신 쿠데타의 밑바탕이 됐거든요.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도 베트남 전쟁 시기에 확립된 거였어요.
1960년대 후반 한국의 민주주의는 완전히 후퇴했어요. 4.19 혁명이 열어젖힌 민주적 공간이 베트남 파병과 3선 개헌을 거치면서 완전히 닫혀버린 거죠.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극도로 제한됐어요. 선거는 형식적으로만 치러졌고, 야당의 활동도 크게 위축됐습니다. 언론은 정부 나팔수 역할에 만족해야 했고, 시민사회는 거의 소멸 상태였어요.
더 심각한 건 이런 상황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에요. 경제성장과 반공 안보를 명분으로 민주주의 후퇴가 정당화된 거였죠. "먹고살기 바쁜데 정치가 무슨 소용이냐"는 인식이 확산됐어요.
교육도 완전히 권위주의화됐습니다. 학교에서는 "반공 도덕"이 최고 가치가 됐고, 비판적 사고는 "불온한 것"으로 여겨졌어요. 학생들은 "국가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라고 배웠습니다.
2025년 현재에도 1960년대 후반에 형성된 구조의 잔재가 남아있어요. 안보를 명분으로 한 시민권 제약, 경제발전 논리로 포장된 권위주의, 군부의 과도한 영향력 등이 그것이죠.
특히 해외 파병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이런 패턴이 반복돼요. 정부가 "국익"이나 "동맹 의무"를 내세우면, 시민들의 의견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는 베트남 파병 당시의 일방적 결정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경제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국가 경쟁력"을 명분으로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문화, 재벌 특혜를 "경제 활성화"로 포장하는 논리 등이 모두 박정희 시대의 유산입니다.
하지만 변화의 조짐도 보여요. 시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정부의 일방적 결정에 대한 견제가 강해지고 있거든요. 베트남 파병 당시처럼 "정부가 결정했으니 무조건 따르라"는 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안보나 경제발전을 명분으로 한 민주주의 제약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시민들의 감시와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억해야 해요.
[다음 회 예고] 제2장 10화: "두 번째 도전: 전두환 쿠데타와 신군부의 등장" - 박정희 사후 잠깐 열린 민주화의 공간을 전두환이 어떻게 12.12 군사반란으로 봉쇄했는지, 그리고 5.18 광주항쟁에서 벌어진 국가 폭력의 참상을 탐구합니다.
[용어 해설]
베트남 파병: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총 32만 명의 병력을 파견한 사건. 미국 다음으로 많은 규모였으며 한국 경제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3선 개헌: 1969년 박정희가 연임 제한을 철폐해 세 번째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한 사건. 민주주의 후퇴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맹호부대·백마부대: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 전투부대. 맹호부대(수도사단)는 1965년, 백마부대(9사단)는 1966년에 파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