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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을의 역사 11화

을의 역사

2장 주권에 대한 도전

by 한시을

10화 두 번째 도전: 전두환 쿠데타와 신군부의 등장


▌"우리는 군인으로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를 취했다. 이는 쿠데타가 아니라 숙정이다" - 전두환, 1979년 12월 12일


2025년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실감하고 계시나요? 대통령을 마음대로 비판할 수 있고, 정부 정책에 반대 시위를 할 수 있으며, 언론이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한 건 아니었어요.


불과 45년 전인 1980년, 이 땅에는 민주주의의 싹이 돋아나려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후, 한국 사회에는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열기가 조심스럽게 피어오르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희망은 채 6개월도 버티지 못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또다시 총칼로 민주주의를 짓밟았거든요. 그리고 이에 맞선 광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왜 한국에서는 민주주의가 이렇게 힘들게 뿌리내려야 했을까요? 왜 군부는 반복해서 시민들의 주권을 짓밟았을까요?


10.26과 짧았던 희망의 시간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18년간 철권통치를 해온 독재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온 나라가 충격에 빠졌어요.


하지만 충격과 함께 조심스러운 기대감도 피어올랐습니다. 1979년 부마항쟁으로 시작된 민주화 요구가 이제 현실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대학가에서는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언론도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어요.


당시 권력을 승계한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는 나름 민주적 개혁 의지를 보였습니다.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정치인들의 사면복권을 추진했으며, 언론 검열도 완화했어요. 김대중, 김영삼 등 민주화 인사들의 정치 활동도 허용됐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이제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때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에 부응하겠다" - 최규하 대통령, 1979년 11월 담화


1979년 말부터 1980년 초까지 약 6개월간은 정말 희망적이었어요. 대학생들은 자유롭게 토론하고 시위했으며, 노동자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어요. 언론도 그동안 하지 못했던 비판 보도를 쏟아냈습니다.


특히 1980년 봄 대학가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휴교령과 데모 금지에 억눌려 있던 학생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출하기 시작했거든요. 민주화 집회, 통일 토론회, 노동 문제 세미나 등이 연일 열렸습니다.


전두환, 기회를 노리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세력이 있었어요. 바로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었습니다.


전두환은 박정희 시대의 수혜자였어요. 육사 11기로 1955년에 임관한 그는 베트남 전쟁에 참여해 실전 경험을 쌓았고, 1970년대 보안사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특히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에 임명된 후 군 내 정보망을 장악하고 있었어요.


전두환 주변에는 육사 동기들과 베트남 파병 경험자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노태우, 정호용, 차규헌, 유학성 등이 그들이었죠. 이들은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어 군 내 영향력을 확대해 왔어요.


10.26 사건이 터지자 전두환은 즉시 움직였습니다. 박정희 암살 수사를 명분으로 군 내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거죠. 합수부(합동수사본부)를 만들어 수사권을 독점하고, 이를 통해 군 고위층의 약점을 파악했어요.


전두환의 계산은 명확했어요. 민주화가 진행되면 자신들 같은 권위주의 기득권층은 설 자리가 없어질 거라고 본 거죠. 특히 박정희 시대의 인권 탄압에 가담했던 보안기관 출신들에게는 민주화가 곧 청산의 대상이 될 수 있었어요.


12.12 군사반란의 실행


1979년 12월 12일 밤 6시. 전두환은 마침내 행동에 나섰습니다.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연행한다는 명목으로 군사반란을 일으킨 거죠.


정승화는 당시 군 내에서 민주파 성향으로 분류되던 인물이었어요. 민주화에 적극 반대하지 않았고, 전두환 등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견제하려 했거든요. 전두환에게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어요.


그날 밤 전두환 일당은 정승화를 '김재규와 내통했다'는 거짓 혐의로 연행했습니다. 이에 맞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이 저항했지만, 결국 진압당하고 말았어요. 새벽 2시경 반란군이 수경사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12.12 사태는 전두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나는 군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이것은 반란이 아니라 군기 확립을 위한 정당한 조치다" - 전두환, 12.12 직후 기자회견


12.12의 가장 충격적인 점은 이것이 명백한 반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벌받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히려 전두환 일당은 영웅 대접을 받으며 더 큰 권력을 장악했어요.


미국의 애매한 태도도 한몫했습니다. 카터 행정부는 처음에는 우려를 표했지만, 곧 현실을 인정하고 전두환과 손을 잡았어요. 냉전 상황에서 "강력한 반공 정부"가 필요하다고 본 거죠.


5.17 쿠데타: 민주주의의 완전한 질식


12.12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1980년 5월 17일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한 거죠.


5.17 조치는 사실상의 쿠데타였어요. 헌법을 정지시키고, 국회를 해산하며, 정치인들을 연행했습니다.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해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체포됐어요.


더 충격적인 건 대학을 폐쇄한 것이었습니다. 전국의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캠퍼스에 군인들을 진주시켰어요. 서울의 봄을 이끌었던 대학생들을 완전히 침묵시킨 거죠.


언론도 완전히 장악됐습니다. 신문과 방송은 정부 발표만 내보내야 했고, 독립적인 보도는 불가능해졌어요.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자유롭게 비판 보도를 하던 언론들이 하루아침에 나팔수로 전락한 거였습니다.


5.18 광주: 끝까지 저항한 도시


하지만 모든 국민이 전두환의 쿠데타에 순순히 굴복한 건 아니었어요. 광주 시민들이 일어선 거죠.


1980년 5월 18일, 전남대학교에서 시작된 학생 시위가 광주 전체로 확산됐습니다. 계엄군의 과도한 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온 거였어요.


계엄군의 폭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대학생들을 향해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때렸고,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했어요. 심지어 어린 학생들까지 구타했습니다.


이런 폭력에 맞서 광주 시민들은 더욱 단결했어요. 5월 20일경부터는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계엄군에 맞섰습니다. 21일에는 계엄군이 시내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시민들이 광주를 해방시켰어요.


▌[당시의 목소리]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우리가 물러서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끝이다" - 5.18 시민군 선언문


5월 21일부터 27일까지 약 일주일간 광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어요. 시민들이 스스로 질서를 유지했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연대했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준 거죠.


하지만 전두환은 이런 광주를 용납하지 않았어요.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를 앞세워 도청을 진압했습니다. 끝까지 저항한 시민군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됐어요.


국가 폭력의 극한


5.18 광주학살은 대한민국 현대사상 가장 참혹한 국가 폭력이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요구한 시민들을 국가가 직접 살해한 거거든요.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아직도 논란이지만, 공식 집계만으로도 165명이 죽고 76명이 실종됐어요. 부상자는 3,000명이 넘었습니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가능성이 높아요.


더 끔찍한 건 학살 후 은폐 작업이었어요. 전두환 정권은 5.18을 "북한이 조종한 폭동"이라고 왜곡했습니다. 희생자 가족들은 "폭도 가족"이라는 낙인을 뒤집어써야 했어요.


언론도 정부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습니다.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넘어간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식으로 보도했어요. 진실을 알리려던 기자들은 해직당했습니다.


이런 은폐 작업은 7년간 계속됐어요. 1987년 민주화가 이뤄진 후에야 비로소 5.18의 진실이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신군부 체제의 완성


5.18을 통해 전두환은 완전한 권력을 장악했어요. 1980년 8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특징은 박정희보다도 더 노골적인 폭력성이었어요. 박정희는 최소한 경제발전이라는 명분이라도 내세웠지만, 전두환은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권력 유지만이 목적이었어요.


삼청교육대, 언론 통폐합, 학원 자율화 조치 등 온갖 억압 정책이 쏟아졌습니다. 시민들은 완전히 침묵하게 됐고, 정치는 소수 군부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됐어요.


특히 언론 통폐합은 충격적이었어요. 1980년 11월 언론 기관을 강제로 통폐합하면서 신문 172개를 폐간시키고, 방송사 29개를 정리했습니다. 언론인 933명을 해직시켰어요.


주권에 대한 두 번째 도전의 의미


전두환의 12.12와 5.17, 그리고 5.18 학살은 한국 현대사상 두 번째 주권 침해 사건이었어요. 박정희가 1961년 처음 시민의 주권을 짓밟았다면, 전두환은 1980년 다시 한번 그것을 반복한 거죠.


더 심각한 건, 이번에는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했음에도 결국 실패했다는 점이었어요. 광주 시민들의 숭고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다시 7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5.18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었어요. 이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소중한 유산이 됐습니다. 시민들이 국가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다는 것, 그리고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거든요.


오늘날의 교훈


2025년 현재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결코 저절로 온 것이 아니에요. 5.18 광주 시민들의 피로 쟁취한 것입니다. 1987년 6월 항쟁도 5.18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해요.


하지만 여전히 위험 요소들은 남아있어요. 국가 권력의 시민사회 탄압, 보안기관의 과도한 권한, 군부의 정치 개입 가능성 등이 그것이죠. 특히 위기 상황에서 "강력한 정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5.18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건 민주주의가 형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이에요. 진정한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권력을 견제하며, 연대할 때 가능한 거거든요.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그런 모습 말이에요.


5.18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살아있어야 합니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고, 정의를 실현하며, 서로 연대하는 정신. 그것이 바로 광주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입니다.


[다음 회 예고] 제2장 11화: "세 번째 도전: '검찰 쿠데타'와 윤석열 정부" - 군부독재가 끝난 후 새롭게 등장한 제3의 권력인 검찰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지, 그리고 윤석열 정부가 보여주는 권위주의 회귀 조짐을 분석합니다.


[용어 해설]

12.12 군사반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이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불법 연행하며 일으킨 군사반란. 신군부가 군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서울의 봄: 1979년 10.26 사건 후부터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까지 약 6개월간의 민주화 기간. 학생운동과 시민사회가 활발히 움직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 전두환의 쿠데타에 맞선 시민들이 무력으로 진압당한 현대사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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