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민주화의 응전 - 시민이 깨어나다
▌"우리는 학생이기 이전에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시민이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나섰다" - 1960년 4월 학생시위 선언문
2025년 현재 젊은 세대를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SNS로 정치 이슈를 공유하고, 선거 때마다 높은 투표율을 보이며, 부당한 권력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요. 이들에게 정치 참여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입니다.
하지만 65년 전에는 이런 모습이 혁명이었어요. 1960년 4월 19일,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독재정권에 맞섰습니다. "학생은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금기를 깨고, "우리도 시민이다"라고 선언한 거였죠.
4.19 혁명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시민의 힘으로 독재를 무너뜨린 사건이었어요. 해방 후 15년 동안 권위주의 정치인들과 친일 기득권 세력에게 휘둘렸던 '을'들이 비로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 거였습니다.
하지만 그 소중한 성과는 채 1년도 버티지 못했어요.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쿠데타로 다시 군부독재가 시작됐거든요. 왜 4.19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을까요? 그리고 이 경험이 한국 민주주의에 남긴 교훈은 무엇일까요?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이승만 정권의 마지막 발악이었어요. 12년간 집권한 이승만은 더 이상 민주적 방법으로는 권력을 유지하기 어려움을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선택한 것이 노골적인 부정선거였습니다. 야당 참관인을 배제하고, 투표함을 바꿔치기하며, 심지어 사전에 기표된 투표용지까지 사용했어요. 특히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기붕이 440만 표를 얻어 당선됐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수치였죠.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어요. 특히 젊은 세대들은 "이게 민주주의냐"며 분개했습니다. 마산에서는 3월 15일 당일부터 시위가 시작됐고, 이것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도화선이 됐어요.
결정적 계기는 김주열 학생의 시신 발견이었습니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의 시신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참혹한 모습이었어요. 이 장면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아침.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이 "부정선거 규탄"과 "이승만 정권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습니다. 이것이 4.19 혁명의 시작이었어요.
학생들의 구호는 명확했어요. "부정선거 다시 하라", "이승만 물러가라", "민주주의 살리자". 이들은 단순히 선거 결과에 항의하는 게 아니라 독재 정권 자체를 거부한 거였습니다.
오후에는 연세대, 서울대 학생들이 합류했고, 시내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졌어요. 저녁에는 시민들도 거리로 나왔습니다. 상인, 노동자, 일반 시민들이 학생들과 함께 독재 타도를 외쳤어요.
▌[당시의 목소리] "민주주의 사수! 독재 타도!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 4월 19일 시위 현장에서 시민들이 외친 구호
경찰은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최루탄과 실탄을 발사해 186명이 사망하고 6,000여 명이 부상당했어요. 하지만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죠.
가장 인상적인 건 시위의 성격이었어요. 이는 단순한 반정부 시위가 아니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민혁명이었습니다. 학생과 시민들이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분명히 드러낸 거였어요.
4월 19일 서울의 시위는 곧 전국으로 확산됐어요.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주요 도시는 물론 지방 소도시까지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특히 지방에서의 시위는 더욱 치열했어요. 마산에서는 4월 11일부터 연일 시위가 계속됐고, 부산에서는 4월 20일 수만 명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대구에서도 시민들이 경찰서를 포위하며 부정선거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어요.
이때의 시위는 과거와는 완전히 달랐어요. 해방 후 15년간 정치는 정치인들만의 전유물이었는데, 이제 일반 시민들이 직접 나선 거였죠. "정치는 우리 일"이라는 의식이 확산된 겁니다.
더 중요한 건 시위의 질서였어요. 폭동이 아니라 평화적 저항이었습니다. 시민들은 질서를 지키며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행동했어요. 이는 한국 시민사회의 성숙함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시위에 이승만 정권은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4월 25일에는 서울대 교수단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시위에 동조했습니다. 지식인들까지 나선 거였죠.
▌[당시의 목소리] "우리는 학생들의 순수한 민주주의 정신에 감동하며, 부정선거 규탄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다" - 서울대 교수단 시국선언문(1960.4.25)
결정적 타격은 4월 26일이었어요. 이날 시위에는 중·고등학생까지 대거 참여했습니다. 어린 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오자 여론이 완전히 돌아섰어요. "학생들을 총으로 쏠 수는 없다"는 분위기가 확산됐죠.
결국 이승만은 4월 27일 하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국민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물러나겠다"며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고 선언한 거였어요. 12년간의 독재가 시민의 힘으로 막을 내린 순간이었습니다.
4월 28일 이승만이 하와이로 떠나면서 4.19 혁명은 완전한 승리를 거뒀어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시민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물러나게 만든 거였습니다.
1960년 8월 출범한 장면 정부는 한국 최초의 내각책임제 정부였어요. 4.19의 정신을 계승해 민주적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장면 정부의 개혁 의지는 분명했어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집회·결사의 자유를 허용했으며, 정치인들의 사면복권을 단행했습니다. 특히 경찰의 정치 개입을 금지하고, 선거 제도를 개선했어요.
대학 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금기시됐던 정치 토론이 자유롭게 이뤄졌고, 통일 논의도 활발해졌어요. 학생들은 "민주주의 역군"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사회 문제에 참여했습니다.
노동운동도 활성화됐어요. 오랫동안 억압받았던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노동조합 결성이 급증했습니다.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도 빈번해졌어요.
하지만 이런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세력들도 있었어요.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보수 엘리트들, 친일파 출신들, 그리고 군부 일부가 그들이었습니다.
장면 정부의 민주주의 실험은 분명 의미가 있었지만, 한계도 많았어요. 첫째, 정치적 혼란이 심했습니다. 내각책임제 하에서 정당 간 갈등이 격화됐고, 정국이 불안정했어요.
둘째, 경제 상황이 악화됐어요. 4.19 이후 사회 혼란으로 경제활동이 위축됐고, 실업률이 급증했습니다. 특히 학생들의 잦은 시위로 수업이 자주 중단되면서 사회 전반에 피로감이 쌓였어요.
셋째, 과도한 자유화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어요. 좌익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빨갱이가 설친다"는 반공 세력의 공격이 거세졌습니다. 통일 논의도 "용공"으로 매도당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넷째, 제도적 기반이 약했어요. 민주주의를 뒷받침할 시민사회나 정당 체계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민주적 문화와 관행도 부족했어요.
이런 한계들은 결국 5.16 쿠데타의 빌미가 됐어요.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 세력이 "혼란한 정치를 바로잡겠다"며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았거든요.
4.19 혁명이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은 "시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식이었어요. 이전까지는 정치를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여겼는데, 4.19 이후 일반 시민들도 정치 주체라는 인식이 확산됐습니다.
특히 학생들의 정치 참여는 혁명적이었어요. "학생은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금기를 깨고, 학생들이 사회 문제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이후 한국 학생운동의 전통이 됐어요.
시민사회의 성장도 중요한 유산이었습니다. 4.19를 통해 시민들이 조직화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생겨났어요. 비록 1년 만에 좌절됐지만, 이는 이후 민주화 운동의 토대가 됐습니다.
하지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쿠데타로 이 모든 성과가 물거품이 됐어요. 민주주의는 다시 26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4.19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 거죠.
4.19 혁명은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제도적 응전'의 시작이었어요. 이전까지는 일부 엘리트들의 정치 활동에 불과했지만, 4.19 이후 일반 시민들이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거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도적 응전의 한계도 드러났어요. 민주주의 제도만으로는 권위주의 세력의 반격을 막기 어렵다는 것이 5.16 쿠데타로 증명됐거든요.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제도뿐만 아니라 강력한 시민사회와 민주적 문화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또한 경제적 안정 없는 민주주의의 취약성도 드러났어요. 정치적 자유는 확대됐지만 경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시민들의 지지를 잃었거든요. 이는 "먼저 먹고살아야 민주주의"라는 박정희의 논리에 설득력을 부여했습니다.
비록 1년 만에 좌절됐지만, 4.19는 한국 민주주의의 소중한 DNA를 남겼어요. 시민 주권 의식, 평화적 저항 정신, 학생들의 사회 참여 전통 등이 그것이죠.
이 DNA는 1980년 5.18 광주항쟁, 1987년 6월 항쟁, 2016년 촛불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매번 위기의 순간마다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를 지켜낸 것은 4.19의 전통이었어요.
2025년 현재 젊은 세대들이 보여주는 정치 참여 의식도 4.19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식,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용기,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의지가 바로 4.19 정신의 계승이에요.
중요한 건 4.19의 교훈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쟁취하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는 더 어려워요.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을 4.19가 보여줬습니다.
[다음 회 예고] 제3장 13화: "유신체제와 부마항쟁: 강화된 도전에 맞선 새로운 저항의 형태" - 박정희가 1972년 유신헌법으로 구축한 영구집권 체제와 1979년 부산·마산에서 벌어진 반유신 시위의 역사적 의미를 분석합니다.
[용어 해설]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을 정점으로 한 학생과 시민들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한국 최초의 시민혁명이다.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대규모 선거 부정. 4.19 혁명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
장면 정부: 4.19 혁명 이후 1960년 8월부터 1961년 5월까지 존속한 내각책임제 정부. 한국 최초의 민주정부였으나 5.16 쿠데타로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