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민주화의 응전 - 시민이 깨어나다
▌"나는 조국 근대화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이 길을 택했다" - 박정희, 1972년 10월 유신 선포
2025년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어요. 대통령 임기는 5년 단임제, 국회의원은 국민이 직접 선거로 뽑고, 언론은 자유롭게 정부를 비판할 수 있다는 것들이죠.
하지만 불과 50년 전에는 이 모든 것이 불가능했어요. 대통령은 임기 제한이 없었고, 국회의원 3분의 1은 대통령이 임명했으며, 언론은 한 마디라도 잘못하면 폐간당했습니다. 바로 1972년부터 1979년까지 7년간 지속된 유신체제의 모습이었어요.
박정희는 3선 개헌으로도 부족했나 봅니다. 1972년 10월 17일, 아예 헌법을 새로 만들어 영구집권 체제를 구축했어요. 이름하여 '한국적 민주주의'. 하지만 실상은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독재체제였죠.
그런데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시민들이 일어났습니다. 유신체제의 폭압에 맞서 "유신 철폐"를 외친 거였어요. 이것이 바로 부마항쟁입니다.
10월 유신: 민주주의의 완전한 질식
1972년 10월 17일 오후 6시. 갑자기 모든 방송이 중단되고 비상계엄이 선포됐습니다. 박정희가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10월 유신"을 발표한 거였어요.
유신 선포의 명분은 "한국적 민주주의 창조"였습니다. 서구식 민주주의는 한국에 맞지 않으니 우리만의 민주주의를 만들겠다는 거였죠. 하지만 실제 내용을 보면 민주주의와는 정반대였어요.
새로운 유신헌법의 핵심은 대통령 권력의 극대화였습니다.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데, 이 국민회의 대의원들은 사실상 정부가 임명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를 빼앗긴 거죠.
더 충격적인 건 대통령 임기였어요. 기존 4년에서 6년으로 늘리고, 연임 제한까지 없앴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게 된 거였어요.
▌[당시의 목소리] "새로운 헌법은 한국적 민주주의의 구현이며, 평화통일과 조국 근대화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다" - 박정희,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문
국회도 무력화됐어요. 국회의원 219명 중 73명(3분의 1)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정회 소속으로 채웠습니다. 아무리 야당이 선거에서 이겨도 과반을 차지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든 거였죠.
긴급조치: 법보다 무서운 대통령령
유신체제의 가장 무서운 무기는 긴급조치였어요.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언제든지 발동할 수 있는 초법적 권력이었습니다.
1974년 1월 발동된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 부정, 반대, 왜곡,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어요. 심지어 유신헌법을 개정하자는 주장조차 불법이 됐습니다.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되고, 군법회의에서 재판받았어요.
긴급조치 4호(1974.4)는 학생들의 정치 활동을 아예 금지했습니다. 대학에서 시국토론회를 하거나 시위에 참여하면 제적당하고 군대로 끌려갔어요. 긴급조치 9호(1975.5)는 더 가혹했습니다. 언론 보도까지 통제하고, 대학 교수의 정치 발언도 금지했어요.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총 9차례의 긴급조치가 발동됐는데, 이로 인해 수천 명이 구속됐습니다. 김대중, 문익환, 함석헌 같은 민주화 인사들은 물론이고, 일반 학생과 시민들까지 '불온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어요.
언론 통제와 우민화 정책
유신체제 하에서 언론의 자유는 완전히 사라졌어요. 1974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대한 광고 중단 사태가 대표적입니다. 정부가 기업들에게 압력을 넣어 이 신문들에 광고를 못 내게 만든 거였죠.
언론인들도 대거 해직당했어요. 1975년 동아일보에서만 100여 명의 기자와 편집진이 해직됐습니다. 정부 정책을 비판한다는 이유였죠. 조선일보, 중앙일보도 마찬가지였어요.
방송은 더 심했습니다. KBS와 MBC는 완전히 정부 나팔수가 됐고, TBC는 아예 정치인이 소유했어요. 뉴스는 박정희 치적 홍보와 반공 프로그램으로 도배됐습니다.
문화 검열도 극에 달했어요. 영화, 소설, 연극, 가요까지 모두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정부 정책에 비판적이거나 "불온한" 내용이 있으면 금지됐어요. 심지어 사랑 노래조차 "퇴폐적"이라며 금지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중화학공업과 성장 제일주의
유신체제의 경제 정책은 중화학공업 육성이었어요. 철강, 조선, 석유화학, 기계공업에 국가의 모든 자원을 집중했습니다. 포항제철, 현대조선소, 울산석유화학단지 등이 이때 만들어졌죠.
표면적으로는 성과가 있었어요. 1970년대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8%를 넘었고, 수출도 급증했습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고도성장이 이뤄진 거죠.
하지만 그 이면에는 노동자들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어요. 하루 12시간 이상 노동은 당연했고, 산업재해도 빈발했습니다. 임금은 최저 수준으로 억제됐고, 노동조합 활동은 철저히 탄압받았어요.
▌[당시의 목소리]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도 없이, 휴일도 없이 일만 하라고 하면서 노예로 부리려 하고 있다" - 전태일 분신 직전 유서(1970.11.13)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분신은 이런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줬어요. 22세 청년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치며 몸에 불을 붙인 거였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불순분자의 선동"으로 매도했어요.
유신체제에 맞선 저항의 씨앗들
하지만 유신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저항의 씨앗들은 꾸준히 자라나고 있었어요. 첫째는 종교계의 저항이었습니다.
가톨릭 정의구현사제단과 개신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앞장섰어요. 1974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민주회복국민회의'는 유신체제에 맞선 최초의 조직적 저항이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문익환 목사 등 종교 지도자들이 용기 있게 나선 거였죠.
둘째는 재야 민주화 운동이었어요.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정치인들과 함석헌, 장준하 같은 사상가들이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비록 계속 구속당하고 탄압받았지만, 꺾이지 않고 저항했어요.
셋째는 학생운동이었습니다. 긴급조치로 공개적 활동은 불가능했지만, 지하에서는 꾸준히 조직이 만들어지고 있었어요. 1979년에 들어서면서 학생운동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체제의 균열
1979년에 들어서면서 유신체제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첫째는 경제적 위기였습니다. 2차 오일쇼크로 경제성장률이 급락했고, 인플레이션이 치솟았어요. "잘살아보자"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서 민심이 흔들렸습니다.
둘째는 국제적 고립이었어요. 19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됐고, 1977년 카터 대통령은 인권 문제를 제기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검토한다고 했어요. 유신체제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미국의 지지가 흔들린 거죠.
셋째는 김영삼의 정계 복귀였어요. 1979년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김영삼은 적극적으로 유신 철폐를 주장했습니다. 특히 1979년 10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박정희를 지지하지 말아 달라"라고 요청한 것이 결정타였어요.
부마항쟁: 유신에 맞선 시민의 함성
1979년 10월 15일, 부산에서 시작된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에 맞선 마지막 저항이었어요. 김영삼 의원 제명에 분노한 부산대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했고, 이것이 시민들에게로 확산된 거였습니다.
부산 시위의 특징은 학생과 시민이 함께했다는 점이었어요. 처음에는 부산대 학생들이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작했지만, 곧 시민들이 합류했습니다. 상인, 노동자, 일반 시민들이 거리로 나온 거였어요.
▌[당시의 목소리] "유신 철폐! 독재 타도! 김영삼을 살려내라!" - 1979년 10월 부산 시위 현장 구호
시위 양상도 격렬했어요. 시민들은 경찰서에 돌을 던지고, 유신 홍보물을 불태웠으며, "유신 철폐"를 외쳤습니다. 정부 청사와 방송국도 포위했어요. 완전히 반정부 시위의 성격을 띤 거였죠.
10월 18일에는 마산에서도 시위가 시작됐어요. 경남대 학생들이 중심이 됐는데, 마산은 4.19 혁명의 발상지였던 만큼 시민들의 호응이 더욱 뜨거웠습니다.
계엄령과 유신체제의 종말
부마항쟁에 충격받은 박정희는 10월 18일 부산과 마산에 계엄령을 선포했어요. 계엄군이 투입돼 시위를 강경 진압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유신체제의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어요.
더 중요한 건 정부 내부의 균열이었습니다. 부마항쟁을 계기로 박정희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사이에 깊은 갈등이 생겼어요. 김재규는 강경 진압보다는 정치적 해결을 주장했지만, 박정희는 더 강력한 탄압을 원했습니다.
결국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18년간의 박정희 시대가 막을 내린 순간이었습니다. 부마항쟁이 유신체제 종말의 직접적 계기가 된 거였죠.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남긴 교훈
부마항쟁은 4.19와는 다른 성격의 저항이었어요. 4.19가 부정선거라는 명확한 쟁점이 있었다면, 부마항쟁은 유신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 거부였습니다.
또한 부마항쟁은 지역에서 시작됐다는 점이 특징이었어요. 서울이 아닌 부산과 마산에서 먼저 저항의 불씨가 타올랐습니다. 이는 유신체제의 억압이 전국적이었고, 저항 의지도 전국적이었음을 보여줘요.
무엇보다 부마항쟁은 "강화된 도전에 맞선 새로운 저항의 형태"였어요. 유신체제처럼 완전히 폐쇄된 독재 시스템에서는 기존의 정치적 저항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시민들이 직접 거리로 나서는 것만이 유일한 돌파구였던 거죠.
오늘날의 의미
2025년 현재에도 부마항쟁의 교훈은 유효해요.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는 보장되지 않습니다. 권력자가 법과 제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려 할 때, 시민들의 직접적 저항만이 이를 막을 수 있어요.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유신 회귀"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있어요. 권력의 집중, 언론에 대한 압박, 시민사회 탄압 등이 과거와 유사한 패턴을 보이고 있거든요.
하지만 희망은 있어요. 2016년 촛불혁명이 보여줬듯이, 한국의 시민들은 부당한 권력에 맞설 용기와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부마항쟁의 정신이 촛불혁명으로 이어진 거죠.
중요한 건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영원하지 않아요. 시민들이 지켜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죠. 부마항쟁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소중한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음 회 예고] 제3장 14화: "5.18 광주, 국가폭력에 맞서다: 민주주의를 위한 무장투쟁의 의미" - 전두환의 12.12 쿠데타 이후 광주에서 벌어진 시민들의 숭고한 저항과 국가 폭력의 참상, 그리고 5.18이 한국 민주주의사에 남긴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용어 해설]
10월 유신: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가 선포한 새로운 헌정체제. 대통령 권력을 극대화하고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한 독재체제였다.
긴급조치: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이 국가 비상시 발동할 수 있었던 초법적 권력. 총 9차례 발동되어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다.
부마항쟁: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벌어진 반유신 시위. 유신체제 종말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지역에서 시작된 시민 저항운동의 모범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