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민주화의 응전 - 시민이 깨어나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우리가 물러서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끝이다" - 5.18 시민군 선언문
매년 다가오는 5월 18일, 광주는 또다시 추모의 물결로 가득할 것입니다.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는 추념식이 열리고, 금남로에는 시민들이 모여 그날의 정신을 기릴 거예요. 이제 5.18은 국가기념일이 됐고, 광주정신은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이 됐습니다.
하지만 45년 전 그날은 달랐어요.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 광주는 완전히 고립된 채 홀로 싸워야 했습니다. 언론은 입을 막혔고, 다른 지역으로의 연락은 차단됐으며, 계엄군의 총칼만이 도시를 지배했어요.
전두환의 12.12 쿠데타와 5.17 비상계엄 확대에 맞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끝까지 저항한 도시가 바로 광주였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무참한 학살을 당했죠.
왜 광주만이 홀로 싸웠을까요? 그리고 5.18이 한국 민주주의사에 남긴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후, 한국 사회에는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기대감이 피어올랐어요. 18년간의 유신독재가 끝나고 드디어 민주주의가 올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그 희망은 채 두 달도 버티지 못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불법 연행하며 군사반란을 일으켰어요. 바로 12.12 사태였죠.
12.12 반란의 성공으로 전두환은 군권을 장악했지만, 아직 정치권력은 완전히 손에 넣지 못한 상태였어요.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가 여전히 정부를 이끌고 있었고, 민주화 요구도 계속 거세졌거든요.
1980년 봄, 대학 가는 완전히 달아올랐습니다.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 대학에서 민주화 집회가 연일 열렸고, "전두환 물러가라", "민주정부 수립하라"는 구호가 캠퍼스를 뒤덮었어요.
▌[당시의 목소리] "유신잔재 청산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민주정부 수립하라!" - 1980년 5월 서울 시내 대학가 시위 구호
전두환에게는 위기였어요. 민주화 요구가 계속 거세지면 자신의 권력 장악이 어려워질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선택한 것이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였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자정. 전두환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어요. 동시에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대학을 폐쇄하며, 언론을 통제했습니다. 사실상의 쿠데타였죠.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한 민주화 인사들이 일제히 연행됐어요. 학생 운동 지도부도 대거 체포됐고, 전국의 모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습니다. 6개월간 타올랐던 민주화의 불꽃이 하루아침에 꺼진 거였어요.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계엄군의 강력한 통제로 저항다운 저항이 일어나지 못했어요. 하지만 광주는 달랐습니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끝까지 저항하기 시작한 거였죠.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모인 학생 200여 명이 "계엄령 철폐"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이었어요.
하지만 계엄군의 진압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이 곤봉으로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어요. 피를 흘리며 쓰러진 학생들을 짓밟고, 대검으로 찔렀습니다. 이는 진압이 아니라 폭행이었어요.
더 충격적인 건 무차별성이었어요.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일반 학생들, 심지어 지나가던 시민들까지 구타했습니다. 나이 어린 여학생들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공수부대의 폭력은 완전히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오후에는 시내로 진출한 학생들이 금남로에서 시위를 계속했어요. 하지만 계엄군은 여기서도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학생들을 마구 때리고 끌고 갔어요.
이런 모습을 본 광주 시민들은 분노했습니다. "왜 우리 아이들을 저렇게 때리나"며 계엄군에게 항의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계엄군은 시민들까지 폭행하기 시작했습니다.
5월 19일부터는 시민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어요. 학생들만의 시위가 아니라 시민들의 저항으로 확산된 거죠. 상인, 노동자, 주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계엄군에 맞섰습니다.
시민들의 분노는 계엄군의 무차별 폭력에서 비롯됐어요. 특히 택시 기사들이 집단으로 나선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계엄군이 택시를 불태우고 기사들을 구타하자, 택시 업계 전체가 들고일어난 거였어요.
▌[당시의 목소리] "학생들을 보호하자!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이 죽는다!" - 5월 19일 광주 시민들의 외침
5월 20일에는 시위 양상이 더욱 격렬해졌어요. 시민들이 버스와 택시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계엄군과 대치했습니다. 계엄군도 최루탄과 곤봉으로 강경 진압에 나섰어요.
하지만 계엄군의 폭력은 도를 넘었습니다. 시위와 상관없는 시민들까지 무차별 구타했고, 심지어 임산부와 어린이들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이런 모습을 본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5월 21일은 5.18의 가장 비극적인 날이었어요. 오후 1시경,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한 겁니다.
헬기에서 기총소사를 하고, 장갑차에서 기관총을 쏘며, 보병들도 시민들을 향해 M16 소총을 난사했어요. 순식간에 수십 명이 쓰러졌습니다. 민주주의를 요구한 시민들을 국가가 직접 살해한 순간이었어요.
이 순간 광주 시민들은 깨달았어요. "우리는 나라에서 버림받았다",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한다"라고 말이죠. 그래서 무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화염병이었지만, 곧 총기를 탈취해 무장했어요.
시민군이 탄생한 거였습니다. 이들은 계엄군에 맞서 광주를 지키기 위해 싸웠어요. 5월 21일 저녁, 시민군의 공격으로 계엄군이 시내에서 완전히 철수했습니다. 광주가 시민들의 손으로 해방된 순간이었어요.
5월 21일 저녁부터 27일 새벽까지, 광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어요. 시민들이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서로 돕고 살았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준 거죠.
가장 놀라운 건 질서였어요. 계엄군이 없어도 범죄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교통을 정리하고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상점들도 문을 열어놓고 장사했는데, 돈을 갖다 놓고 물건을 가져가는 신뢰 사회였어요.
음식 나누기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주먹밥과 우유를 만들어 시민군과 시민들에게 나눠줬어요. 나이 든 어머니들이 "우리 아들"이라며 시민군들을 챙기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방송도 시민들이 직접 했어요. MBC 광주방송국을 점거해 시민방송을 했는데, "광주의 진실"을 전하려 노력했습니다. 비록 다른 지역으로는 전파가 나가지 않았지만, 광주 시민들에게는 소중한 정보 통로였어요.
하지만 광주는 완전히 고립돼 있었어요. 모든 통신이 차단됐고, 언론은 침묵했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광주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더 절망적인 건 정부의 반응이었어요. 전두환 일당은 5.18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동"이라고 왜곡했습니다. 시민들의 정당한 저항을 "빨갱이 짓"으로 매도한 거였죠.
미국의 태도도 충격적이었어요. 주한미군 사령관과 미국 정부는 전두환의 무력 진압을 사실상 승인했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보다는 안정이 우선이라고 본 거죠.
시민군 지도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저항하기로 결정했어요. "우리가 물러서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끝이다"라는 각오였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어요.
5월 27일 새벽 4시. 공수부대와 20사단이 도청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어요. 시민군들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화력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새벽 5시 20분, 마지막 총성이 울린 후 도청이 함락됐어요. 끝까지 저항한 시민군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됐습니다. 10일간의 광주 해방은 이렇게 끝이 났어요.
하지만 이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5.18 정신은 한국 민주주의의 소중한 자산이 됐고, 1987년 6월 항쟁의 원동력이 됐어요. 2016년 촛불혁명까지 이어지는 시민 저항의 DNA가 된 거죠.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여러 면에서 한국 민주주의사에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국가 폭력에 맞선 무장저항이었어요. 4.19나 부마항쟁이 평화적 저항이었다면, 5.18은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국가 폭력에 맞선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시민들의 저항권을 실현한 역사적 사례였어요.
둘째, 진정한 민주주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줬어요. 10일간의 해방된 광주는 권력이나 강제 없이도 시민들이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서로 돕고 살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셋째, 지역적 저항에서 전국적 의미로 승화됐어요. 처음에는 광주만의 문제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민주주의 전체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5.18의 진실이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전두환 정권 7년간은 "폭동"으로 왜곡됐고, 1987년 민주화 이후에야 진상 규명이 시작됐습니다.
1995년 5.18 특별법 제정, 2000년 5.18 국가기념일 지정, 2011년 5.18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등을 거쳐 5.18은 명실상부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았어요.
하지만 여전히 왜곡과 폄훼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어요. 일부 정치세력들이 5.18을 "북한 개입" 운운하며 진실을 훼손하려 하고 있거든요. 이는 5.18 정신에 대한 도전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입니다.
2025년 현재에도 5.18 정신은 살아있어야 해요.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용기, 서로 돕고 연대하는 정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의지가 바로 그것이죠.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 5.18 정신은 더욱 중요해요. 권위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시민사회가 탄압받는 상황에서 광주의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요한 건 5.18을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만 여기지 않는 것이에요. 현재 진행형인 민주주의 과제로 인식하고, 그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계승입니다.
광주가 보여준 것처럼,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소중한 가치예요. 그리고 그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다음 회 예고] 제3장 15화: "6월 항쟁과 87 체제의 양면성: 선거 민주주의의 성취와 실질적 주권의 한계" - 1987년 6월 항쟁이 어떻게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는지, 그리고 87 체제가 가져온 성취와 한계를 분석하며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의 차이를 탐구합니다.
[용어 해설]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 전두환의 군사쿠데타에 맞서 시민들이 무장 저항한 한국 민주주의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시민군: 5.18 당시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맞서 무기를 들고 저항한 광주 시민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12.12 군사반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이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불법 연행하며 일으킨 군사반란. 신군부가 군권을 장악한 사건으로 5.18의 배경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