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 누구의 ' 해방이었나?
▌"해방은 왔지만 광복은 오지 않았다" - 김구, 1945년 12월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이 울려 퍼졌을 때, 서울 거리는 환호와 태극기로 뒤덮였습니다. 35년 만의 해방이었죠.
하지만 기쁨도 잠시, 곧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일제강점기 총독부 관리들이 그대로 일하고 있고, 친일파들은 "나는 원래 애국자였다"며 태극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정작 중국에서 27년간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는 개인 자격으로만 입국이 허용됐어요.
이게 정말 우리가 꿈꿔왔던 '광복'이었을까요? 해방은 분명 왔는데, 왜 진정한 주권자들은 소외된 채 기존 기득권 세력이 다시 권력을 쥐게 된 걸까요?
1945년 9월 8일, 미 24군단이 인천에 상륙하면서 남한에 미군정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미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뭔지 아세요? 조선총독부 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킨 거예요.
미군정 포고령 제1호(1945.9.7)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조선 내 모든 일본 정부기관과 총독부는 임시로 존속하며, 모든 공무원은 계속 근무한다. 다만 미군정청의 감독하에 둔다." - 미군정 포고령 제1호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어요?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조선인 관리들이 그대로 해방된 조선을 다시 통치하게 된 거예요. 단지 상관이 일본 총독에서 미군정장관으로 바뀌었을 뿐이죠.
더 충격적인 건 미군정의 인사 정책이었어요. 하지 중장을 비롯한 미군정 수뇌부는 일본어는 할 줄 알았지만 한국어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니 소통할 수 있는 조선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어 교육을 받은 친일 엘리트들뿐이었어요.
1945년 10월 5일 아널드 미군정장관은 김성수를 비롯한 11명의 한국인을 군정장관 고문으로 임명했습니다. 1946년 1월에는 조병옥이 미군정청 경무부장(경무국장)에 임명됐고, 장택상이 수도경찰청장에 임명됐어요.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고등교육을 받고 활동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럼 정작 27년간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했던 상하이 임시정부는 어떻게 됐을까요?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사적 정치단체'로 취급했어요.
김구가 1945년 11월 23일 환국했을 때의 상황을 보면 참담합니다. 공식적인 영접도 없었고, 개인 자격으로만 입국이 허용됐어요. 27년간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운 임시정부 주석이 마치 '정치 망명객'처럼 취급받은 거죠.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명확했어요. 맥아더 사령부의 내부 문서를 보면:
▌[당시의 목소리] "한국임시정부는 한국인들을 대표할 수 없다. 이들은 중국에서 너무 오래 살았고, 한국 내에서의 지지 기반이 불분명하다." - 맥아더 사령부 정책보고서(1945.10)
이건 정말 아이러니한 논리였어요. 조국을 떠나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조선을 대표할 수 없다'라고 했으니까요. 반대로 일제에 협력하며 조선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실무 능력이 있다'며 중용한 거죠.
해방 직후 가장 놀라운 광경 중 하나는 친일파들의 변신이었어요. 어제까지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한 거죠.
대표적인 예가 이광수입니다. 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청년들에게 일본군 지원을 독려했던 그가 해방 직후 『백민』(1946.1)에 발표한 글 「나의 고백」을 보면:
▌[당시의 목소리] "나는 마음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일본과 싸우는 마음으로 지내왔다. 다만 일제의 강압하에서 불가피하게 시국에 따라 행동하였을 뿐이다." - 이광수, 『백민』(1946.1)
윤치호도 마찬가지였어요. 일기에서 "조선인은 독립할 능력이 없다"라고 했던 그가 해방 후에는 자신을 "언제나 민족주의자였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더 심각한 건 이런 변신이 사회적으로 용인됐다는 점이에요.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과거를 추궁할 여유가 없었던 거죠. 오히려 "실무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이들이 다시 중요한 자리에 앉게 됐어요.
그럼 정말 해방된 조선에는 자주적인 정치 세력이 없었을까요? 아니에요.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1945년 8월 15일 바로 결성됐고, 9월 6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어요.
조선인민공화국은 나름의 정당성이 있었습니다. 좌우합작을 지향했고, 친일파 숙청을 명확히 했으며, 토지개혁 등 민중의 요구를 반영한 정책을 내세웠거든요.
하지만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공산주의 단체"라고 규정하며 해체 압력을 가했습니다. 여운형이 추진한 좌우합작 통일정부 구상도 미군정과 우익 세력의 반대로 좌절됐죠.
결국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한지근이라는 극우 청년에게 암살당합니다. 해방된 조선에서 가장 현실적인 통일 정부 구상을 제시했던 인물의 비극적 최후였어요.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이승만이었습니다. 1945년 10월 16일 미군 전용기를 타고 귀국한 그는 미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어요.
이승만이 미군정에게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첫째, 반공주의자였고, 둘째, 미국에서 오래 살아 미국의 논리를 이해했으며, 셋째, 임시정부와는 별개의 인물이라 '새로운 지도자'로 포장할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승만의 권력 기반은 허약했어요. 그래서 그가 택한 전략이 바로 친일파와의 연합이었죠. 반공을 명분으로 "친일파든 아니든 우리 편이면 된다"는 논리를 펼쳤어요.
1948년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정부에는 일제강점기에 관료나 지식인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다수 참여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장택상이 초대 내무부장관에 임명됐어요. 이는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반발로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됐습니다. 국회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른 것이었죠.
반민특위는 나름 성과를 거뒀어요. 친일파 3,000여 명의 명단을 작성하고, 주요 친일파들을 체포해 조사했습니다. 박흥식, 최린, 김연수 등이 구속됐죠.
하지만 이승만과 경찰은 반민특위 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했어요. 1949년 6월 6일에는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자료를 압수하는 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결국 반민특위는 1949년 8월 해체됐고, 실질적인 친일파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반공을 명분으로 친일파들이 더욱 대담하게 활동하게 됐죠.
결국 1945년 해방은 '누구의' 해방이었을까요? 35년간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의 해방은 아니었어요. 일제강점기 기득권층이 새로운 권력과 결합해 계속 지배층으로 남는 '엘리트들의 해방'이었죠.
진짜 '을'이었던 민중들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을'로 남아있었어요. 일제강점기에 착취당했던 농민들은 해방 후에도 지주의 소작농으로 남았고, 친일 경찰들은 '반공 경찰'로 둔갑해 민중을 탄압했습니다.
김구가 "해방은 왔지만 광복은 오지 않았다"라고 한 말이 바로 이런 현실을 정확히 표현한 거예요. 형식적으로는 주권을 회복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진정한 주권자들이 배제된 채 새로운 지배 구조가 만들어진 거죠.
이때 형성된 구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기회주의적 엘리트들이 권력 교체기마다 변신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는 패턴, 진정한 개혁 세력보다는 '실무형 인재'를 선호하는 문화, 과거 청산보다는 '현실적 타협'을 우선시하는 관행들이 모두 이때 뿌리를 내렸거든요.
21대 대선에서 모후보자가 2024년 공직자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의 국적은 일본이었다"라고 발언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죠.또 요사이 리박스쿨, 늘봄학교 문제로 시끄럽지요.윤석렬 정부가 어린이들에게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고 항일과 민주항쟁은 폄훼하는 교육을 조직적으로 시킨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하고 있어요.
하지만 희망은 있어요. 4·19 혁명부터 촛불혁명까지, 기득권 엘리트들의 지배에 맞서는 시민들의 힘이 계속 성장하고 있거든요. 진정한 '광복'은 아직 진행형인 것 같습니다.
[다음 회 예고] 제2장 6화: "제주 4·3 사건의 비극: 분단 과정에서 희생된 민중의 주권" - 1948년 제주도에서 벌어진 대학살이 어떻게 분단체제 구축 과정에서 발생했는지, 그리고 국가권력이 어떻게 민중을 '빨갱이'로 낙인찍어 제거했는지 탐구합니다.
[용어 해설]
미군정: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까지 남한을 통치한 미국 군정. 조선총독부 기구를 그대로 활용하며 친일 관료들을 재기용했다.
조선인민공화국: 1945년 9월 여운형 등이 선포한 임시정부. 좌우합작을 지향했으나 미군정이 인정하지 않아 해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