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주권의 침탈과 최초의 응전
▌"조선인을 조선인답게 기르되, 충량한 일본 신민으로 기른다" - 일제 조선교육령
여러분, 혹시 이런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3·1 운동으로 그렇게 큰 충격을 받은 일제가 왜 갑자기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유화정책을 펼쳤을까요?
1919년 3월 이후, 일제는 급하게 통치 방식을 바꿨습니다.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고,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일부 허용했죠. 심지어 조선어 신문 발행도 허가했어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던 일제가 갑자기 관대해진 이유가 뭘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일제는 깨달았어요. 조선인을 총칼로만 누르는 건 한계가 있다는 걸 말이죠. 그래서 더 교묘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바로 '정신 지배'였어요.
만약 외계인이 1920년대 조선을 관찰했다면 아마 고개를 갸우뚱했을 겁니다. "어? 식민지인데 왜 갑자기 자유로워 보이지?" 하지만 이건 진짜 자유가 아니었어요. 이는 더 완벽한 지배를 위한 정교한 함정이었습니다.
문화통치가 뭐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걸 "일제가 조금 관대해진 시기"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랬을까요?
1922년 개정된 조선교육령을 보세요. "조선인을 조선인답게 기르되, 충량한 일본 신민으로 기른다"는 목표를 내걸었어요. 언뜻 보면 조선인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습니다. 조선인다움을 남기되, 그 정신은 완전히 일본화하겠다는 뜻이었거든요.
이게 얼마나 교묘한 전략인지 아시나요? 조선인들에게 "너희 문화도 존중한다"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 문화의 알맹이는 완전히 일본식으로 바꿔버리는 거예요.
▌[당시의 목소리] "조선인은 조선인이로되 동시에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 조선인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일본 정신을 체득하게 하는 것이 교육의 방침이다." - 우가키 가즈시게 조선총독(1931)
새로운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더 영리했습니다. 그는 "조선인과 일본인은 한 가족"이라는 내선일체론을 내세웠어요. 한국어로 하면 "우리는 모두 한 형제"라는 식이죠. 듣기 좋은 말이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을 영원한 '동생' 역할에 묶어두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일제의 진짜 무서운 점은 교육 시스템을 통해 조선인의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려 했다는 겁니다.
새로운 교육과정에서는 일본어를 '국어'라고 불렀고, 조선어는 '조선어'라는 하나의 '과목'으로 격하시켰어요. 역사 수업에서는 조선의 독자적 역사를 지우고, 일본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사를 가르쳤습니다.
더 교묘한 건 이른바 '실업교육' 강화였어요. 조선인들에게는 고등교육보다는 기술교육을 시켰죠. 겉으로는 "실용적인 교육"이라고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을 영원히 기술자나 하급 관리직에 머물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조선인에게는 고등학문보다는 실업에 유용한 교육이 적합하다. 이것이 조선인의 천성에 맞는 교육이다." - 일제 교육당국자 담화(1925)
그런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건,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조선인들 중 일부가 실제로 일제의 논리를 내면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스스로를 '2등 일본인'이라고 여기면서,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조선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예요.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게 바로 '친일 엘리트' 계층입니다. 이들은 일제의 교육을 받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조선인들이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들을 단순히 "배신자"라고 부르기엔 뭔가 복잡한 면이 있었어요.
이들 중 상당수는 진짜로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라고 믿으면서 친일 행위를 했거든요. "일본과 협력해야 조선도 근대화할 수 있다", "저항하면 더 큰 피해만 온다"는 식의 논리였죠.
대표적인 인물이 이광수였습니다. 그는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면서 "조선 민족은 약하고 게으르니 일본을 본받아 개조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어요. 윤치호도 비슷했죠. "조선인은 아직 자치 능력이 부족하니 일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의 논리가 교묘한 이유는 '조선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이에요. 겉으로는 애국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던 거죠.
1920년대 조선 사회는 묘한 분위기였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로워 보였거든요. 신문도 나오고, 문학작품도 발표되고, 정치적 논의도 어느 정도 허용됐으니까요.
하지만 이 모든 '자유'에는 조건이 있었어요. 일제의 틀 안에서만 가능한 자유였죠. 독립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금기였고, 일제를 비판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이른바 '새장 속의 자유'였던 셈이에요.
더 무서운 건, 많은 조선인들이 이런 상황에 적응해 버렸다는 점입니다. "이 정도면 살 만하다", "독립은 꿈이고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죠.
일제는 바로 이런 걸 노렸어요. 조선인들 스스로가 저항 의지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 이게 바로 '정신적 식민화'의 완성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조선인이 일제의 함정에 빠진 건 아니었어요. 많은 지식인들이 이 상황의 위험성을 깨닫고 나름의 저항을 시도했죠.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을 주장했어요. "지금 당장 독립운동을 하기보다는 실력을 기른 후에 독립하자"는 논리였죠. 하지만 이것도 결국 현 상황을 인정하는 셈이었어요.
신간회 같은 단체는 "민족적 단결"을 강조하면서 합법적인 민족운동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결국 해산당하고 말았죠.
가장 비극적인 건, 저항하려는 사람들조차 일제가 만든 게임의 룰 안에서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진짜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했어요.
1920년대 조선의 상황이 오늘날과 무관할까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가짜 주권"이 넘쳐납니다.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 사회지만, 실제로는 특정 권력이나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죠. 언론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이나 권력의 눈치를 보는 경우도 있고요.
더 무서운 건, 이런 상황에 우리 스스로가 적응해 버리는 경우예요. "이 정도면 괜찮다", "현실적으로 이게 최선이다"라고 합리화하면서 말이죠.
1920년대 친일 엘리트들도 비슷한 논리를 썼어요.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자"고요. 하지만 그 결과가 어땠는지 우리는 알고 있죠.
다음 회에서는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까지, 일제의 식민 지배가 어떻게 극단으로 치달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황국신민화 정책과 전시체제 하에서 조선인들이 겪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은 저항 정신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다음 회 예고] 제1장 4화: "이중 주권의 비극: 독립운동 세력과 식민지 협력세력의 대립 구도" - 일제강점기 말기 황국신민화 정책 하에서 벌어진 조선인들의 정체성 혼란과, 끝까지 저항했던 세력과 협력했던 세력 간의 깊어진 균열을 탐구합니다.
[용어 해설]
내선일체론: '일본 본토(내지)와 조선(선)이 하나'라는 일제의 이데올로기. 조선인을 영구적으로 2등 신민으로 고착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실력양성론: 안창호 등이 주장한 민족운동론. 무력 저항보다는 교육과 산업 발전을 통해 실력을 기른 후 독립하자는 이론이었으나, 현실 인정론이라는 비판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