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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을의 역사 03화

을의 역사

1장 주권의 침탈과 최초의 응전

by 한시을

2화 3·1 운동과 주권 회복의 꿈: 식민권력에 맞선 직접행동의 정치학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 기미독립선언서


여러분, 잠깐만요. 105년 전 이야기인데 왜 지금도 3월 1일이 되면 가슴이 뜨거워질까요?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 한 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조선 땅 어디서나 일본 헌병이 칼을 차고 다니는데, 왜 하필 이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까요? 죽음을 각오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이들은 25년 전 동학농민들이 심어놓은 '민중주권'의 씨앗을 꽃피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외계인이 당시 조선을 관찰했다면 분명 깜짝 놀랐을 겁니다. "어? 식민지 백성들이 갑자기 주권자처럼 행동하네?" 그렇습니다. 3·1 운동 참가자들은 단순히 "일본이 싫다"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들은 스스로를 나라의 주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숨겨진 혁명적 메시지


기미독립선언서를 다시 한번 자세히 봅시다. 우리는 보통 이걸 "독립 요구서"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그게 다일까요?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여기서 핵심 단어는 '자주민'입니다. 이는 단순히 일본에서 벗어나자는 게 아니라, 조선 사람들 스스로가 주권의 주체라는 선언이었어요. 최남선이 기초하고 손병희 등 33인이 서명한 이 선언서는 사실상 민중주권의 정치적 manifesto였던 셈이지요.


[당시의 목소리] "우리는 오늘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 평등의 대의를 표명 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 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 기미독립선언서(1919.3.1)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건, 독립선언서가 두 가지 상반된 메시지를 동시에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편으로는 "조선 독립의 당연함"을 천명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에 대한 원한이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당시 민족 지도층의 현실적 판단을 보여주는 대목이에요.


민중이 만든 진짜 혁명의 현장


하지만 3·1 운동의 진정한 의미는 민족 대표 33인의 태화관 모임에 있지 않았습니다. 진짜 혁명은 거리에서 일어났죠.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시위는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갔습니다. 평양, 대구, 부산은 물론이고 이름도 모르는 작은 농촌 마을까지, 조선 땅 어디서나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메아리쳤습니다. 일본 측 기록만으로도 3월부터 5월까지 3개월 동안 1,542회의 시위에 연인원 202만 명이 참가했다고 해요.


더 놀라운 건 이 운동의 전방위적 성격입니다. 학생과 지식인은 물론이고, 농민, 노동자, 상인, 심지어 기생까지 거리로 나섰어요. 성별과 나이, 신분을 가리지 않은 진정한 '민중 총궐기'였던 거죠.


[당시의 목소리] "총칼이 우리를 협박할 수는 있어도 우리의 정신만큼은 굴복시킬 수 없다. 우리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우리의 자유에 대한 의지만큼은 꺾을 수 없다." - 유관순의 법정 진술(1920.5.9)


이게 단순한 시위였다고 보이나요? 천만에요. 이건 조선 민중이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선언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비폭력 저항이라는 놀라운 선택


3·1 운동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지점은 '비폭력 원칙'입니다. 참가자들은 철저히 평화적 방법을 고수했어요. 돌멩이 하나 던지지 않고, 오직 맨몸과 목소리로 일제의 총칼에 맞섰죠.


그런데 여기서 잠깐. 1919년이면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이 본격화되기 전입니다. 인도에서 무저항 운동이 시작된 게 1920년대거든요. 그런데 조선의 민중들이 이미 1919년에 비폭력 직접행동을 실천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하지만 일제의 대응은 잔혹했습니다. 헌병과 경찰은 무차별 발포로 시위대를 진압했고, 수원 제암리에서는 교회에 주민들을 몰아넣고 불을 지르는 집단 학살까지 자행했어요. 일본 측 기록으로도 사망자 553명, 부상자 1,409명에 달했으니, 실제 피해는 훨씬 컸을 겁니다.


좌절된 꿈, 그러나 계승된 DNA


3·1 운동은 즉각적인 독립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운동이 남긴 유산은 거대했어요.


첫째,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의 정당성을 제공했습니다. 임정은 3·1 운동을 배경으로 "조선 민족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다고 선언할 수 있었죠.


둘째, 일제의 통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무단통치의 한계를 절감한 일제는 이후 문화통치로 정책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어요.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직접행동의 정치학'이 한국사에 뿌리내렸다는 점입니다. 제도 정치가 막혔을 때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는 것, 이는 3·1 운동에서 시작되어 4·19, 5·18, 6월 항쟁, 그리고 촛불혁명까지 이어지는 한국 민주주의의 독특한 전통이 되었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말했듯이,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운율을 가집니다. 3·1 운동의 운율은 100년 넘게 한국사에 메아리치고 있어요.


여전히 유효한 질문: 우리는 정말 주권자가 되었나?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요? 우리는 정말 3·1 운동이 꿈꾸었던 '자주민'이 되었을까요?


형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투표권을 가지고 있고, 대통령을 탄핵시킬 수도 있어요.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을'의 감각을 느끼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권력 앞에서 말이죠.


3·1 운동 참가자들이 외쳤던 "대한독립만세"는 단순히 일제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꿈꾼 건 진정한 민중주권, 모든 사람이 정치적 주체로 존중받는 사회였습니다. 그 꿈은 과연 실현되었을까요?


[다음 회 예고] 제1장 3회 차: "가짜 주권의 그림자: 일제 식민교육과 친일 엘리트 계층의 형성" - 3·1 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통치를 통해 어떻게 조선인의 의식을 지배하려 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친일 협력 세력이 형성되었는지 탐구합니다.


[용어 해설]


자주민(自主民): 기미독립선언서에서 사용된 용어로, 스스로 주인이 되는 민족을 의미한다. 주권의 주체로서의 민중을 강조한 개념.


직접행동의 정치학: 기존 제도 정치의 한계를 넘어 시민들이 직접 거리로 나서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 3·1 운동에서 확립된 한국 민주주의의 독특한 전통.


문화통치: 1919년 이후 일제가 펼친 통치 정책. 겉으로는 유화적이었지만 실제로는 더욱 교묘한 방식의 식민 지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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