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주권의 침탈과 최초의 응전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의 국적은 일본이었다" - 2024년 한 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
2024년 한 고위 공직자의 이 발언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중국적 논란도 끊이지 않고요.
그런데 이런 정체성의 혼란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에요. 거슬러 올라가 보면, 80년 전에도 비슷한 고민이 있었거든요.
아침에는 일본어로 천황 만세를 외치고, 저녁에는 몰래 조선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들. 1940년대 조선인들은 매일 이런 이중적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나는 조선인인가, 일본인인가?"
이 질문 앞에서 조선 민족은 완전히 둘로 갈라졌어요. 그 시절 이광수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조선 청년으로서 황군에 투신함은 영광의 극치다." 반면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감옥에서 순교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식민 정책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조선인다운 일본인'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조선인을 '진짜 일본인'으로 만들려 했어요. 그리고 이 분열은 해방 후에도 깊은 상처로 남게 됩니다.
1937년 이후 일제가 추진한 황국신민화 정책은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결성 취지서」(1938)를 보면 그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요.
"조선에 거주하는 2,400만 민중이 일치단결하여 황국신민의 연성과 총후국민의 의무를 완수하여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조선인'이라는 표현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겁니다. 이제는 그냥 '황국신민'일 뿐이었어요.
1940년부터 시작된 창씨개명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죠.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40년 8월부터 1945년까지 전체 조선인 가구의 79.3%가 일본식 성명으로 바꿨습니다. 강제는 아니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취직이나 승진이 불가능했어요.
▌[당시의 목소리] "창씨는 조선인이 황국신민으로서 천황폐하에 대한 충성의 진심을 표하는 길이며, 내선일체의 실현을 위한 긴요한 방책이다." - 조선총독부 발표(1939.11.10)
언어 정책도 극단적으로 변했습니다. 1938년부터 조선어 과목이 선택과목으로 바뀌었고, 1941년에는 아예 폐지됐어요. 학교에서는 조선어를 사용하면 체벌을 받았고, '국어(일본어) 상용 가정'이라는 인증까지 받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조선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논리를 보면 단순한 기회주의가 아니었어요. 나름의 '신념'이 있었던 거죠.
이광수가 1940년 발표한 글 「조선민족의 진로」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조선민족이 일본민족과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조선민족의 최고 행복이요 최대 영광이다. 이것이 바로 내선일체의 참뜻이다." - 이광수, 『매일신보』(1940.10.5)
윤치호도 비슷한 논리를 폈어요. 그는 일기에서 "조선인은 혼자서는 독립할 능력이 없으니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적었습니다.
종교계도 마찬가지였어요.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가결했고, 많은 목사들이 이를 지지했습니다. 심지어 김활란 같은 여성 지도자도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닌 국민의례"라며 찬성했어요.
가장 충격적인 건 지원병제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시작됐을 때, 모집인원 400명에 2,946명이 지원했어요. 경쟁률이 7.4대 1이었죠.
하지만 모든 조선인이 굴복한 건 아니었어요. 소수지만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가 대표적이에요. 그는 1938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결국 평양감옥에서 순교했죠.
▌[당시의 목소리]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니 목숨을 걸고라도 반대한다." - 주기철 목사, 1938년 마지막 설교
조선어학회도 끝까지 한글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이들은 비밀리에 「조선어대사전」 편찬 작업을 진행했어요. 하지만 1942년 일제에 발각돼 이윤재, 한징 등이 옥사했습니다.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는 1940년 광복군을 창설하며 무력투쟁을 계속했습니다. 비록 실질적인 전력은 미미했지만, 끝까지 저항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일반 민중들의 소극적 저항도 있었습니다. 창씨개명률이 79.3%였다는 건, 반대로 20.7%는 끝까지 거부했다는 뜻이기도 하죠.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항복했습니다. 하지만 35년간 누적된 분열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어요.
가장 큰 문제는 친일파 청산이었습니다.『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자는 4,389명에 달했어요. 하지만 해방 후 이들 대부분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습니다.
미군정은 행정의 연속성을 위해 친일 관료들을 그대로 기용했고, 이승만 정부도 반공을 명분으로 친일파 청산을 회피했어요. 오히려 좌우 대립 과정에서 "친일파든 아니든 우리 편이면 된다"는 논리가 횡행했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1948년 설치됐지만, 이승만과 경찰의 방해로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1949년 해체될 때까지 실질적인 성과는 거의 없었어요.
지금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2024년 공직자의 발언은 단순한 실언이 아니에요.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형성된 기회주의적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거든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권력에 줄 서는 모습들. 신념보다는 생존과 출세를 우선시하는 태도들. 이런 현상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일제강점기 협력 엘리트들의 행태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있어요. 주기철 목사처럼 끝까지 신념을 지킨 사람들의 정신이 여전히 살아있거든요. 4·19 혁명부터 촛불혁명까지,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DNA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 회 예고] 제2장 5화: "'누구의' 해방이었나: 탈주권적 건국 과정과 상해임시정부 배제의 내막" - 해방 후 미군정과 친일 기득권 세력이 어떻게 새로운 국가 건설을 주도했는지, 그리고 진정한 광복 세력은 왜 배제됐는지 탐구합니다.
[용어 해설]
황국신민화: 1937년 이후 일제가 추진한 조선인 완전 동화 정책. 창씨개명, 조선어 사용 금지, 신사참배 등을 통해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려 했다.
창씨개명: 조선인에게 일본식 성씨와 이름 사용을 강요한 정책.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전체 가구의 79.3%가 일본식 성명으로 변경했다.
반민특위: 해방 후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 1948년 설치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정치적 방해로 실질적 성과 없이 1949년 해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