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방을 쓰며

- 아버지

by 박노빈


입춘방을 쓰며


- 아버지


박 노 빈


1


50만 제2 국민병 일원이 되나


고위 장교들의 보급품 착복


9만 명이 죽어나가는 한겨울


동상 걸린 커다란 발로 대구에서 용인까지 천신만고 걸고 걷다


뱃속에 큰 누나 이름을 짓고


저격능선 전투 포병으로 다시 영장을 받고 참전한 아버지


정일권 사단장을 따라


1952년 10월 14일 새벽 5시 5만 발의 포탄을 퍼부으며 전투 시작


6주 동안 42번 산정 주인이 바뀌다


중공군 - 1만 4867명이 죽거나 다치자


오성산 북쪽으로 철수하며 궁예의 나라, 철원평야 포기


아버지의 전우 - 4683명이 죽거나 다침


이 전투에서 날아온 총알, 아버지의 발등을 스치다


삶과 죽음은 한 끗 차이


2


조병창에서 맞이한 해방, 일본도를 찬 19세 소년


기미가욜 불러야만 했으나 만세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


새벽 4시, 삼팔선을 무너뜨리던 우레 소리의 해일


그 속에서도 내 자식은 친구가 가르치던 동네 서당


봄마다 한해 무사 안녕을 빌며 쓴 고사리 손들의 빛나는 휘호


해마다 2월은 간지러운 손끝의 계절


1년 단 하루


간절히 울어 대는 손끝


이씨네 정씨네에게 배우던 박씨네


잠들기 전 천장에서 날카롭던


입춘방의 마지막 글자


통할통 자의 책받침이 마음에 칼날로 날아와 뽑혀지지 않는다


스나이퍼 산 꼭대기에서 맹활약하는


중공군 스나이퍼들


반전여론이 들끓는 아메리카, 그들이 주고 간 어마어마한 양의 미제 무기 맘껏 쏟아붓다


저격능선 전투의 포성이 귀에 쟁쟁했으므로


오로지 술에 의지해 생을 버티던 한 사내


광명리 버스 종점에서 도덕산까지


술집마다 들려 군번을 외며 하소연해도 아무도 대신 들을 수 없던


- 피∼∼∼ 킁! 피∼∼∼ 킁!……


깜깜한 밤의 포성과 조명탄과 전우의 비명


아들들에게조차 잊혀진 군번


3


어머니 마음을 밟고 내려가신다


집안네들 지경꾼 되었으니 기다리든 말든


땅속까지 깊이 내려가서 지축이 울릴 만큼 큰소리로 울다


저승 문 앞에서 에우뤼디케를 목 놓아 부르는 오르페우스


서로 까치발로 키를 재며 아이들처럼 즐거워 하던 연인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어머니의 기막힌 무나물


고부가 친모녀처럼 살가운 모습


- 오 남매 막내딸 이제 3학년인 쟤는 어쩌냐?


고 따진다


아버지의 피 맺힌 오열이


일가친척과 고향산천에 올올이 새겨지다


덩달아 몇 달을 울던 동네 분들


아 서러운 운명의 횡포


4


입술 퉁퉁 부으면서도 조병창에서 하모니칼 부는 오르페우스


해와 같이 저무는 동네에는 백결 선생의 퉁소 소리


화려한 채색으로 빛나던 유행가 가사집은


오남매의 유일한 그림책


동네와 직장을 주름잡던 세헤라자드


아직도 하늘에서 잠꼬대 일기를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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