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마와 준족

by 박노빈


준마와 준족


박 노 빈


1


사방에서 출몰하는 오랑캐


원나라와 홍건적과 왜구와 싸워야 했던 이성계 장군에겐


장군의 뒤에서 목숨을 노리는 왜구를 쓰러뜨린 의형제 이지란 말고도


여덟 명의 말 친구가 있었네


여진산 명마로 원나라 승상 나하추를 쫓아내고


홍건적을 평정할 때 화살을 두 발 맞았고


또렷한 눈동자와 휘날리는 갈기와 꼬리털이 아름다운 말은


구름을 가로지르는 송골매를 닮았다 하여, 횡운골(橫雲鶻)


여진산 흑마로 화살 한 발 맞고도


솟구치는 기운을 어찌할 줄 몰라서 봄이면 풀밭에서 뒹구는 말은


바람을 쫓아가는 까마귀 같다 하여, 추풍오(追風烏)


함경도 안변 출신으로 청년 시절 장단에서 노루를 쓰러뜨리고


절벽 직전에서 아슬아슬 말머리를 돌렸던 말은


벼락을 내뿜는 붉은 말이라 하여, 발전자(發電赭)


단천 출신으로 해주에서 왜구를 물리쳤고 화살 한 발을 맞은 말은


용이 날아오르는 듯한 자줏빛 명마여서, 용등자(龍騰紫)


제주도 출신으로 위화도 회군 때 탔던 말은


서리가 내린 듯한 백마여서, 응상백(凝霜白)


강화도 출신으로 1380년 황산대첩에서


왜구 대장 아기발도를 죽일 때 탄 말은


사자처럼 사나운 황색마라서, 사자황(獅子黃)


함흥 출신으로 토동에서 왜구를 무찌를 때 탄 말은


검은 표범 같은 흑마라서, 현표(玄豹)


2


그중에 가장 아끼는 말은 함흥 출신의 유린청(遊麟靑)


옆으로 뻗친 덥수룩한 갈기와 풍성한 꼬리털을 늘어뜨리고


기린처럼 노니는 푸른 말!


1370년 요동 지역을 공격할 때


칠십여 발 화살을 모두 몽골군의 얼굴에 명중시켜서


오녀산성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는 것을 지켜보았고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칠 때


오른쪽 가슴과 왼쪽 목덜미, 오른쪽 볼기에


적과 싸우며 맞은 화살 세 발, 영광스러운 승전의 상처를 지니고도


장군과 이십오 년을 함께 살다가


온 나라가 슬퍼하며 화려한 석관 속에 정중히


장례를 치룬 행복한 말 친구


3


홍건적에게 평양과 개성을 함락당하고


사십여 년을 왜구들에게 농락당한 처참한 고려 땅


황산대첩까지 5년 동안만도 이백사십 곳에서 백여섯 번


서른이나 되는 왜구 해적단이 설쳤다


500여 척의 배를 몰고 진포에 와서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밧줄에 묶어 노예로 팔고


두세 살 난 여자아이를 머리 깎고 배를 갈라 생쌀을 넣고 제사를 지내는


왜구들을 지리산 도망병 칠십만 남기고 모조리 소탕한 황산대첩


다리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말을 두 번 갈아타면서도


말 천 육백 마리를 얻으며 끝내 대승을 거둔


구국의 영웅, 마흔여섯 살 이성계 장군


4


아버지는 위풍당당하게 말을 타고 호령하는 장군의 모습을


정성을 다해 붓으로 그려서


몇 해 동안 액자 속에 걸어두었다


어느 해 설날 전날이었다


5


- 다그닥다그닥


마룻바닥 소리가 진짜 말발굽 소리 같은 학교 복도


고향 산천


켄타우로스처럼 말이 된 내가 달리던


6


준마가 준족이 된다


골대를 향해 질풍처럼 내닫는


독일 분데스리가의 차범근


2002 월드컵 때 홍명보,


영국 프로축구 무대의 박지성, 손흥민……


2022년 3월 24일 밤,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이란에게 2대 0으로 승리


11년 이어지던 무승의 징크스를 깼고, 17년 만에 2점 차 승


코로나 때문에 3년만에 모인 1만 3천여 관중의 붉은 악마 응원


1000억 연봉을 받는 프리미어리거


손흥민 주장의 발끝에서 나온 대포알 같은 선제골


10회 연속 본선에 참가하는 2022년 카타르 월드컵


7


2002월드컵 때


포르투갈과의 경기


결정적 게임이라서 온 국민이 그 게임에 집중하면서 시선으로 티브이를 살라 먹을 기막힌 때


모두 지레 겁 먹고 뒤로 물러나 비관론이 대부분이었을 때


혹은 가뭄에 콩 나듯 너무 지나친 낙관론자들이 문어 박사도 비관론에 점을 찍을 정도로 지구촌 전체가 태극 전사를 못 믿건만 자기의 무한한 낙관론에만 기대여 전혀 얼토당토 않은 대희망의 시나리오를 가끔은 쓰고 욕먹고 있을 때


명장 히딩크 감독과 태극 전사들의 서사마저 꿰뚫고 있었던 우리 세 식구


경찰 아들을 따라 여럿이 철길을 걸어서 오백 원을 주고 어렵게 사온 장군이 될 수도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원서


그걸 과감히 포기


고 3때 선생님들 한결같은 염원대로


육사를 과감히 포기한 댓가로 만난 지금의


아내와 내 딸은 하느님의 커다란 은총이다


우리는 양 직장에서 둘 다 서로 입을 맞춘 것처럼 대단한 상금이 걸린 게임 스코어 맞추기 시합에서 텔레파시가 통한 듯이 한 목소리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스코어


- 일 대 영


을 외쳤던 것이다 두 학교의 유일무이한 예상, 비웃음과 통렬한 비판과 정확한 논거가 열거 되었으나 우리 부부는 고집이 불통, 둘 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고독한 예언자를 자처하였다 박지성의 골이 그대로 결승골이 되다니!


박지성의 골이 승리의 축포가 되고, 이탈리아, 스페인까지 이기니


대형 전광판마다 전국민이 쏟아져 나와 붉은 악마들의 물결이 도도하게 흘렀다 어느 거리나 차 위에 올라 대형 태극기를 흔들어 댔다 이 나라를 떠나려던 이들도 이민을 취소하고 모두 애국심에 불타올라 커다란 나라, 대.한.민.국. 이 되었다


우리 맘 속에 기마 민족의 피가 끓는가


*2022.1.26일자 '중앙일보 31면./유성운/역지사지/팔준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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