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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모 비아토르 Oct 08. 2022

낯선 사람은 믿을만한가?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11/2020071100361.html



오늘 김지수 기자는 ‘타인의 해석’의 저자 말콤 글래드웰과 인터뷰를 했다.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칼럼을 통해 이 책을 꼭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낯선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미국의 스타 저술가 말콤 글래드웰은 ‘타인의 해석’에서 이 모든 참사가 ‘우리가 타인을 극단적 위험 신호로 간주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증명해간다. 만약 우리가 낯선 이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성찰했다면 플로이드가 질식해서 사망하는 일, 블랜드가 텍사스 유치장에서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뭐든 한쪽으로 치우쳐서 극단적으로 바라보면 문제가 발생한다. 타인에 대해서도 그 사람의 진실 여부를 떠나 과잉 위험신호로 간주하면 내 주위를 둘러싼 낯선 사람은 지뢰밭처럼 느껴질 수 있다. 



‘상대가 사실을 말한다’고 믿는 인간의 본능을 완전히 무시하면, 경찰관들은 낯선 이를 과잉 공격하고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아내려 하고 지역사회는 신뢰를 잃고 초토화된다.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가치는 무엇일까? 대상관계 이론과 양육 가설에 따르면 주양육자와의 관계에서 맺어진 신뢰 정도에 따라 “이 세상은 믿을 만한 곳이야.” 혹은 “이 세상은 믿을 수가 없어. 나 혼자야.” 등의 신념체계를 획득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상대가 사실은 말한다’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어느 정도 신뢰한다는 기본 신념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다. 그만큼 상대의 진위여부를 따지기 전에 내가 그 상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히틀러를 직접 만나고도 전쟁광임을 간파하지 못한 영국 정치가 체임벌린부터, 오랜 기간 내부 스파이에게 우롱당한 미 정보국까지. 챕터마다 성범죄자, 무고한 시민, 자살한 유명인사 등 다양한 유형이 ‘낯선 인물’로 등장하고, 그에 대한 우리의 오해가 거대한 임상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진다.

우리가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이 진짜 얼마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류에서 잔혹하고 악을 행한 사람조차 외관상 그들이 그런 짓을 저지를 거라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타인을 정말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외모, 이미지, 드러나는 성격이 그들을 나타내는 것일까? 혹시 나의 판단 오류로 그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사람은 판단 오류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잘 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낯선 사람을 쉽게 알 수 없다. 낯선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걸고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태도는 ‘타인이 정직하다’는 훈련된 본능을 믿는 것이다.

낯선 사람을 한번 보고 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오만일 수 있다. 사람은 제각각 다르며 그들이 풍기는 외적인 부분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내적인 부분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마음은 ‘타인이 정직하다’는 전제로 다가가는 것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그는 “세상에서 아름답고 의미 있는 일들의 대부분은 낯선 사람과 과감하게 말을 터보면서 시작된다”며 “속이려 드는 사람을 당해내긴 어렵지만, 위험은 감수할 가치가 있다”라고 전했다.

낯선 사람은 그 정체를 알 수 없기에 위험 신호로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과감하게 말을 걸라는 것은 낯선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바보가 아닌 이상 본능적으로 낯선 사람에 대한 위험 신호를 감수하라는 것은 어떤 유익이 있기에 시도해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인생에서 낯선 이들의 대화와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여서 예상치 못한 관계의 확장과 즐거움을 얻었다. 나는 환대와 호의를 믿는다. 경험적으로 보면 그 혜택이 위험보다 훨씬 더 크다.

나이가 들수록 낯선 환경과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진다. 겉으로는 경계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사회적 미소 가면을 쓴다. 그러나 내적 갈등은 심해진다.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함으로써 예상치 못한 관계의 확장과 즐거움을 얻었다고 한다. 이 문장이 마음에 와닿는다. “예상치 못한 관계의 확장과 즐거움”이란 문구에서 설렘과 기대감이 올라온다. 위험보다 혜택이 크다면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에 도전해 볼만하다. 


생각해보라. 우리의 뇌는 친한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익숙하다. 낯선 사람들과는 아예 접촉을 꺼리고 피하려고 한다. 그게 내가 흥미를 느낀 포인트다. 잘 아는 사람과 쌓은 상호작용 방법으로 잘 모르는 사람과 직면해야 하는 상황! “

익숙한 사람과의 상호작용은 그 사람들에게만 국한된다. 낯선 사람들과 새롭게 상호작용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것이 어렵고 두려워 계속 익숙한 사람과 어울리면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의 기회는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익숙함에서 벗어나 낯선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삶의 한 영역에서 구축한 진정한 통찰력은 다른 영역에 가면 거의 쓸모가 없다. 당신도 나도 자주 말을 섞고 지낸 친구나 가족, 오랜 시간 교류한 동료는 그나마 좀 알고, 여러 각도로 공감하려 애쓴다. 안타깝게도 그와 비슷한 자신감을 낯선 사람에게 적용하면 실패 확률이 높다. 그것이 내가 재앙을 일으킨 특정 ‘상호작용’을 탐색하고 얻은 결과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다. “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로 들린다. 내가 아는 것은 특정 영역일 뿐이다.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을 만날 때는 그 환경과 사람에 맞는 것을 배우고 터득해야 한다. 여기서 ‘겸손’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겸손하고 배우려는 태도로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정직하다'는 ‘진실 기본값’과 ‘태도와 내면은 일치한다'는 ‘투명성 가정'에 우선해서 타인을 판단한다. 단언컨대, 신뢰는 모든 의사소통 전략 중에서 가장 효율적이다. 그래야 우리가 소통하고, 협력하고, 친구를 만들고, 복잡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정직하다'는 '진실 기본값'으로 접근하고 있는가?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투명성 가정’에서 ‘태도와 내면은 일치한다’라고 믿고 싶지만 머릿속에서는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퍼즐 맞추기를 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결론은 사람 관계의 기본은 신뢰이다. 상대가 신뢰할 만하냐 보다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느냐가 우선시 된다. 


다양한 샘플을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언제 믿고 믿지 말아야 할지 알아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신뢰를 주었다 뺏었다’를 자유자재로 결정할 만큼 우리는 타인에 대해 절대로 알지 못한다."

모든 인간관계의 바탕은 신뢰이다. 더 나아가 위험할 수 있는 낯선 사람에게도 신뢰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서 주는 위험보다 혜택이 크기 때문에 도전과 용기가 필요하다. 예기치 않은 관계의 확장과 즐거움을 위해 한번 도전해 볼만하지 않을까?


우리는 은연중에 알고 있다. 타인을 믿는 만큼 발전하고 기회가 생긴다는 사실을. 당신이 신뢰 상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의미 있는 사회적 만남을 할 수 없다. ‘진실 기본값'과 ‘투명성 가정'에 맞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른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시대에서, 이 두 가지 룰은 여전히 유효하고 유익하다. “

내가 믿는 만큼 세상은 확장되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 불신은 타인과 벽을 만들고 자기 안으로 더 숨게 된다. 자기를 보호하고 위험을 줄이기 위해 타인을 의심하고 경계를 한다고 하지만 그 뒤에 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더욱 고립시키고 세상에 홀로 남게 된다.


나는 독자들이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나만의 통찰을 따르는 편이다. 나에게 묻는다. "말콤! 뭘 하고 싶지?" 내가 관심을 가지면, 다른 사람들도 그 주제에 흥미를 느낄 거라는 확신이 있다. 창의적인 많은 사람이 균형을 잃고 슬럼프에 빠지는 이유는, 타인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 많이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타인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신경을 쓰기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초점을 맞추자.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공감하고 호응해줄 그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아닌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려고 애쓰지 말고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내가 말하고자 한 바는, 그 어떤 재능이든 완전하게 발달하고 표현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완벽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없다. 우리가 인지적으로 복잡한 과업을 평가할 때, 1만 시간의 연습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몸이 기억하게 만드니까.


하지만 이것이 누구나 충분히 연습하면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 그건 정말 말도 안 된다. 내가 골프를 2만 시간 친다고 해도 절대 타이거 우즈가 될 수 없다. 첼로를 20년 켠다고 해도 요요마처럼 연주할 수는 없다. 예체능 분야에서 타고난 소질은 필수적이다. 기본적으로 탁월함은 1만 시간과 재능의 결합 상품이다. 어떤 것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1만 시간의 법칙’을 잘못 오해할 뻔했다. 충분한 연습만 하면 무엇이든 잘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충분한 연습과 타고난 재능이 합쳐졌을 때 놀라운 결과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먼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그중에 내가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파악한 후 충분한 연습을 해야겠다. 



"내가 가진 근본적인 생각은 하나다. 인간의 행동과 인식, 그리고 성과는 자기 자신을 벗어난 어떤 힘에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문화, 역사, 이념, 가족, 맥락, 환경과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역사와 공동체의 융합의 결과물이다.


달리 말하면, 내 저술 작업은 인간의 관점을 자기 안의 작은 영역에서 자기 밖의 세상을 향해 옮겨가려는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준 교훈도 마찬가지 아닐까. ‘당신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누구에게 노출되어왔느냐’가 감염에 있어 중요한 문제다."


내 주변을 둘러싼 환경에 의해 계속해서 상호작용하고 있고 영향을 주고받고 있기에 ‘누구에게 노출되어왔느냐’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외부의 다양한 자극과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그러한 상호작용으로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형성해왔다. 지금 현재 ‘누구에게 노출되어왔느냐’라는 질문에 대답을 할 필요가 있다. 그 대답 속에 지금 이 순간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안다’고 자만하지 말라! 일단 들어주라!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 전에 한 템포 더 기다리라."


누군가를 ‘안다’고 자만할 수 없다. 왜냐면 그 사람이 말해주기 전에는 그 사람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고 재단하는 오류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람이 말할 때까지 그 사람의 속도에 맞추어 기다려주고 그 사람의 세계 속에 들어갈 준비를 하면 된다. 



이념적으로 반대편에 선 사람들과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공통점이 훨씬 더 많다. 마음을 열어야 그 사실을 발견하고 인내심을 발휘해야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나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나와 다르다는 생각에 먼저 선을 긋고 상대를 알려고 하는 생각조차 차단했다. 나와 반대편에 선 사람들에게 불편한 감정은 있겠지만 열린 마음을 가지고 저들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서 그들이 가진 사실을 알아가 보자. 


칼럼을 읽고 나서 낯선 사람에 대한 평소 나의 태도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내가 보고 믿는 만큼 돌려준다는 생각도 들었다. 낯선 사람에 대한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 수 있는 것은 위험보다 혜택이 크다는 것이다. 인생 어디서나 위험요소는 존재한다. 그 위험이 무섭다고 움츠려 들고 시도를 하지 않으면 자기 세계 속에 갇힐 수 있다. 과잉된 위험 반응은 타인을 더 불신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조차 나쁜 사람으로 간주하게 된다. 결국 타인과의 관계 단절로 연결될 수 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속에 낯선 사람과의 만남도 내포된다. 오늘 칼럼에서 조금씩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구체적으로 탐색하고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낯선 환경이든, 낯선 사람이든 위험은 내포된다. 그러나 위험하다고 처음부터 방어태세를 취하고 익숙한 사람과 환경에 안주할 것이 아니다. 낯선 환경에 노출하고 낯선 사람을 만나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즐거움과 삶의 확장을 경험했으면 좋겠다. 


김지수,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낯선 사람이 더 안전하다... 타인 믿어야 유익” 말콤 글래드웰, 경향신문, 2020년 7월 11일

1. 새롭게 알게 된 어휘: 판단 오류, 투명성 가정, 티핑포인트

-투명성 가정: 표정은 내면을 반영한다.

-티핑포인트: 인기가 없던 제품이 갑자기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는 시점이나 계기.

2. 나중에 써보고 싶은 어휘: 성토, 직면, 아이러니, 상호작용, 암묵적인, 융합, 탐색

-성토: 여러 사람이 모여 국가나 사회에 끼친 잘못을 소리 높여 규탄함.

-직면: 어떠한 일이나 사물을 직접 당하거나 접함.

-아이러니: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 

-상호작용: 사람이 주어진 환경에서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 서로 관계를 맺는 모든 과정과 방식.

-암묵적인: 자기의 의사를 밖으로 나타내지 아니한.

-융합: 둘 이상의 요소가 합쳐져 하나의 통일된 감각을 일으키는 일

-탐색: 드러나지 않은 사물이나 현상 따위를 찾아내거나 밝히기 위하여 살피어 찾음.

3. 뜻은 알지만 내 글에서 써본 적 없는 어휘: 폭력, 진압, 절규, 참담, 환대, 호의, 신뢰, 슬럼프

-폭력: 남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에 쓰는, 주먹이나 발 또는 몽둥이 따위의 수단이나 힘. 넓은 뜻으로는 무기로 억누르는 힘을 이르기도 한다.

-진압: 강압적인 힘으로 억눌러 진정시킴.

-절규: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절하고 애타게 부르짖음.

-참담: ①끔찍하고 절망적임. ②몹시 슬프고 괴로움.

-환대: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

-호의: 친절한 마음씨. 또는 좋게 생각하여 주는 마음.

-신뢰: 굳게 믿고 의지함.

-슬럼프: 운동 경기 따위에서, 자기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저조한 상태가 길게 계속되는 일.

4. 인상 깊은 어휘: 성찰, 타인, 낯선, 기회비용, 확장, 통찰력

-성찰: 자기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핌.

-타인: 다른 사람.

-낯설다: 전에 본 기억이 없어 익숙하지 아니하다.

-기회비용: 한 품목의 생산이 다른 품목의 생산 기회를 놓치게 한다는 관점에서, 어떤 품목의 생산 비용을 그것 때문에 생산을 포기한 품목의 가격으로 계산한 것.

-확장: 범위, 규모, 세력 따위를 늘려서 넓힘.

-통찰력: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봄.

5. 굶은 글씨로 밑줄 그은 부분은 기사 내용 그대로 인용한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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