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變化)는 세상에 존재하는 물체의 형상, 성질 등의 특징이 달라지는 것을 말한다. 특징이 강해지거나 약해질 수도 있고, 새롭게 되는 것도 변화라고 한다. 이 글에서의 변화를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심리적인 측면에서의 의미로 '회복', '건강한 상태', '적응적인' 단어를 선택하고 싶다. 자신과 타인을 힘들게 하고, 부적응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과 타인을 편안하게 하고 적응적이며 건강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정신건강 관련 일을 해오며 '사람은 변화하기 힘들긴 하지만 변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며 이 일을 해왔고 지금도 그 생각은 마찬가지다.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사람은 그나마 변화가능성이 보인다. 그러나 자기 문제를 합리화하고 남 탓을 돌리며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접하며 '저 사람은 정말 변화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의 말에 공감을 못하고 자신의 고통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타인의 고통에는 무감각하다 못해 짓밟기까지 한다.
때론 자신이 가해자임에도 가해자라는 사실은 빼 버리거나 축소시키고 어떤 이유로든 피해자라고 주장할 때가 있다.
사람은 다 각양각색이다. 똑같은 경험을 겪어도 반응이 다 다르다. 천편일률적으로 사람을 정의하고 접근하는 것은 오류에 빠질 수 있어 조심스럽고 주의 깊게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고민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성격장애든 정신질환이든 그 기준틀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는 생각이 든다.
진단기준과 증상에 대한 지식은 갖추고 있으되 개별적인 차원에서 사람을 바라보고 표면적인 문제에서 내면의 핵심문제를 접근해야 한다. 동일한 진단과 증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반응하는 차이가 있다. 결코 진단명과 증상으로 그 사람을 다 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람마다 강점이 있고, 취약성이 각기 다르다.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들을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면 도와줄 수 없다.
사람은 변화할 수 있는가?
변화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지금 당장 변화유무를 확정 지을 수 없다. 다만 농부가 봄에 씨앗을 심는다는 심정으로 상담과 프로그램을 한다. 그 과정에 대한 수확 여부는 내 가 아닌 신께 맡겨야 할 것 같다. 사람의 변화는 상담자 혹은 치료자가 주된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내담자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누구도 사람의 깊은 속을 다 알 수 없고 언제 어떻게 변화될지 미지수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희망은 누군가의 씨앗이 언제 어떻게 열매로 맺어질지 알 수 없기에 오늘도 그 희망을 품고 현장에 나아가 사람을 만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 잠재된 힘을 믿는다.
나와의 만남이 종결될 때까지 변화가 없었다 해도 훗날 다른 만남을 통해 변화할 수 있다. 또 미래에 어느 날의 사건과 과거 치료내용이 재결합되어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다. 그 변화의 시점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당사자조차도 말이다.
당장 혹은 단기적으로 사람의 변화를 바라는 건 개인적인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멀리 내다보며 지금 내 눈앞에 내담자의 어려움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나의 한계와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한계와 불완전성에 귀 기울이며 그 마음속을 함께 여행한다. 사람은 서로 소통하며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그렇게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헤쳐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