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마주하는 감정 쉼표

컵 속에 담긴 감정의 실체는?

by 호모 비아토르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선한 인간이 이긴다는 것, 믿으라’ 이어령, 넥스트”, 조선비즈, 2022년 1월 1일


* 굵은 글씨로 밑줄 그은 부분은 기사 내용 그대로 인용한 문장입니다.


김지수 기자는 이전에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이라는 책에서 만났던 적이 있다. 그녀는 한 사람에게 집중해서 그가 가진 인생을 조명해주며 그 사람에게 담긴 인생의 의미, 가치, 철학을 전개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오늘 김지수 기자는 암 투병을 하고 있는 이어령 선생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짤막하게 기사에 소개했다. 이어령 선생 역시 ‘딸에게 보내는 굿 나이트 키스’라는 책에서 만났다. 암 투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딸에 대한 그리움과 생전에 못다 한 말을 한밤중 눈물을 훔치며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책(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죽음이란 어떤 상태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관찰하고 온몸으로 감각화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죽음은 동물원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내게 덤벼드는 기분’이라는 말로 척추 신경으로 죄어오는 공포도 숨기지 않았다. 죽음과 떨어져 죽음을 바라보면 객관적으로 거리두기를 하며 볼 수 있다. 그러나 죽음과 맞닿아 있을 때 철창 사이에서 당장이라도 나를 덮칠지 모르는 긴박함과 두려움이 엄습할 것 같다. 이어령은 밤마다 어둠의 시침과 통증의 분침으로 압박해오는 죽음의 시간과 팔씨름 내기를 했고 거기서 얻은 전리품으로 사유는 깊어졌다. 어떤 고통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자기를 잃지 않고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만약 어느 밤 내게 고통과 죽음이 엄습할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혹시 공포와 두려움에 압도되어 이성을 잃고 공포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지는 않을까? 지금은 죽음과 떨어져 있어서 ‘나는 안 그래.’라고 생각하지만 나란 존재는 그 상황이 되면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 자신도 장담할 수 없다.


컵 하나로 마인드와 보디, 스피릿을 설명하며, 컵(육체)이 깨지고 그 안에 담긴 물(욕망, 감정 등의 마인드)이 쏟아져도 컵이 생길 때 만들어진 원래의 빈 공간(영혼)은 우주에 닿아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로 우리를 위로했다. 사람의 육체를 컵으로 비유했다. 컵 안에는 욕망과 감정이 담겨있다. 육체가 깨져버린 컵은 욕망과 감정은 사라지고 영혼만이 남는다. 컵 안에 가득 채워진 욕망과 감정을 덜어내기는커녕 흘러내리는 상상을 해본다. 결국 육체가 소멸되어야 강제로 욕망과 감정이 사라지는 현상을 보게 될까?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제발 적당한 욕망과 감정을 유지했으면 좋겠다. 넘치는 욕망과 감정은 나와 타인을 힘들게 한다. 컵 속에 빈 공간을 보고 싶다. 채워진 컵을 비워야만 볼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끊임없는 욕망과 무의식 깊숙이까지 자리 잡고 있는 수많은 감정들을 어떻게 덜어낼 수 있을까? 어느 정도까지 있는지 그 양과 무게는 측정 가능한 걸까? 솔직히 제대로 보려고도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나는 마지막이라는 말이 참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아직도 꿈이 있고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단서가 생기면 거짓말을 못 해요. 많은 분의 부탁으로 ‘마지막’이 끊어질 듯 이어지지만, 나는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매번 최상의 힘을 냅니다.”

내일이 없는 삶은 어떻게 다가올까? 말은 늘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살자.’라고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실제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 마지막이 끊어질 듯 이어진다는 것은 약하고도 약한 얇은 실 같은 생명줄을 의미하는 걸까? 그런 상황에서 최상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그것은 육체가 아닌 정신 즉 영혼에서 나오는 힘이지 않을까? 육체는 마르고 시들어도 결코 마르거나 시들지 않는 것은 영혼이다. 점점 젊어지고 활력이 넘치는 영혼을 만들기 위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멍 때리기! 자기만의 진공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 익사하기 직전에 노아의 방주처럼 진공의 배를 만드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한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결정장애’라는 정신장애 진단기준에도 없는 새로운 진단명이 나타난 것만을 보더라도 지금 이 시대에는 생각중지라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자기만의 진공 상태에서 자기다움이 창조되고 정보의 홍수 속에 떠밀려 내려가지 않을 힘이 생긴다.

감정도 말로 표현해야 감정으로 나오는 거예요. 감정은 있는데 말이 없다면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 말로 표현해야 감정이 나오고 감정의 실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감정표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다. 감정표현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관건이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정화되지 않은 감정표현은 마치 쓰레기 배설구가 될 수 있다. 감정은 느끼고 인지하고 표현하기까지 어느 과정도 쉽지 않아 보인다.


깨달을 때의 환희를 ‘타우마제인’이라고 해요. 나는 누구를 위해서 글을 쓴 적이 없어요. 나를 향해 썼고, 내가 발견한 타우마제인이 벅차서 쓴 거예요. 그걸 독자가 같이 읽고 공감해주면 신이 났어요.

인생을 살면서 어떨 때 환희를 경험했을까? 새로운 것을 알아갈 때, 나로 인해 누군가의 인생에 도움이 되었을 때가 아니었을까? 신나는 감정을 일상 속에서 자주 느꼈으면 좋겠다. 독서, 글쓰기, 걷기, 배우기, 듣기, 말하기 등 그게 어떤 것이 되었든지 말이다. 아마도 이러한 환희와 깨달음이 영혼을 늙지 않게 하는 비법일지도 모르겠다.


느껴서 움직이는 게 감동이에요. 돈 줘서 움직이는 게 아니야. 느끼면 움직여요. 강요하거나 지시해서 움직이는 것은 진짜 움직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잠깐일 뿐이다. 진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건 스스로 느껴서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지시나 강요가 아닌 감동을 주어 스스로 움직이게 한 적이 있는가? 갑자기 자녀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잔소리가 습관이 되어버린 내 모습을 보며 자녀들이 스스로 느껴서 움직이길 바라본다. 그러려면 일상에 감동의 순간이 필요하다. 어떤 감동이 있을 수 있을까? 아이들에겐 놀이의 감동이지 않을까?


책과 진리는 도서관에도 있고 길바닥에도 있고 쓰레기통에도 있어요. 쉽게 주어졌어도, 우리는 애써 못 가질 것들만 찾아다니니, 불행해요. 주어진 상황보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하느냐가 중요해 보인다. 어디서든 배울 수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이 나한테 도전을 해와야지, 내가 책을 정복하려 들면 안 돼요. 책은 내게 말을 걸어요. ‘너 나 읽을래? 어렵지? 소가 풀을 뜯듯 자유롭게 책을 읽으라는 거예요. ‘책이 내게 말을 건다.’는 글을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된다. 나는 산에 가면 ‘자연이 내게 말을 건다.’고 느꼈다. 내가 사랑하면 그 존재가 말을 거는 착각이 드는 것 같다.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책은 학습을 위한 목적이라면 금세 식어지겠지만 그냥 좋아서 읽는 거라면 영원한 친구처럼 같이 가면 될 것 같다. 나에게 책은 늘 변함없이 내 곁을 지켜주는 편안한 친구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바리새인 같은 종교인보다, 실수하고 못났지만 그래도 인간을 믿고 희생애를 간직한 성기훈이 가장 예수와 닮은 사람이라고. ‘오징어 게임’은 돈과 빚에 찌든 한국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이 이런 나쁜 짓을 했습니다” 하는 순간 모순을 드러냈기에 자유로운 것이다. 자신을 고발하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면 희망이 있다. 결국 선이 악을 이기고 인간은 믿을 만하다는 것, 세계인들은 그걸 보고 안도한 것이다. 아직 오징어 게임을 보지 못했다. 다만 영화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영화의 대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었다. 돈을 쫓아가는 삶에 치부를 드러낸 이 영화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 치부를 드러내 고발하는 것이 건강한 것일 수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마치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그 죄와 멀어지려는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숨기고 회피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 나은 건강한 방법이 드러내고 볼 수 있는 용기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성기훈처럼 자기 안에 있는 휴머니티예요. 자기 안의 세계성, 자기 안의 영성... 오징어 게임 같은 세상에서 여러분을 아름다운 승자로 만듭니다. 믿으세요. 착한 자가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여러분이 보는 악한 현실과는 다른 원리가 역사를 지배해왔다는 것을. 휴머니티가 결국은 생명 자본이라고 했다. 내 안에 영성을 발견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그저 채우기에 급급한 삶에서 내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려다 볼 수 있는 용기는 있을까? 매 순간 바뀌고 흘러가는 감정을 얼마나 인지할 수 있을까?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감정을 들여다보고 인지할 때 더 이상 채우려는 행위를 멈춘다. 그리고 멈춰서 멍 때리며 자신의 속을 보게 된다. 비로소 꽉 채워져 있던 마음을 비워내는 작업을 하게 된다. 비워진 마음에서 영혼을 만나면 자기 정체성을 찾고 선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 필요하다.

“가장 고통스러울 때죠. 한밤중에, 새벽 3~4시에 가장 아파요. 그때 나는 신의 존재를, 은총을 느껴요. 고통의 한가운데서 신과 대면해요. 동이 트고 고통도 멀어지면 하나님도 멀어져요. 조금만 행복해도 인간은 신을 잊습니다(웃음).” 인생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는 걸까? 고통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삶에 행복이 넘치면 신은 필요치 않은 걸까? 그래서 하나님은 인생 곳곳에 고통을 준비해놓고 나를 만날 준비를 하고 계신 걸까? 그렇다면 고통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내 입장에서는 저주이지만 하나님은 나를 만나기 위한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구나.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세상에는 뭐든지 때가 있다. 그때를 피할 수는 없다. 겨울이 오고 있음을 알고 준비하고 받아들이는데 용기가 필요하다.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하는 가운데 나는 당당하게 겨울을 맞이할 수 있을까? 두려움과 공포를 없앨 수 없다. 이어령 선생은 마치 두려움과 공포가 공존함에도 당당하게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당당함과 용기를 잃고 싶지 않은데 나는 상황에 따라 자꾸 흔들린다.


“생은 선물이고 나는 컵의 빈 공간과 맞닿은 태초의 은하수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또 한 번 겸허히 고백하자면, 나는 살아있는 의식으로 죽음을 말했어요. 진짜 죽음은... 슬픔조차 인식할 수 없는 상태, 그래서 참 슬픈 거지요. 그 슬픔이 이르기 전에 전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별을 보며 즐거웠어요. 하늘의 별의 위치가 불가사의하게 질서 정연하듯, 여러분의 마음의 별인 도덕률도 몸 안에서 그렇다는 걸 잊지 마세요.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지며 여러분과 작별합니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느끼는 슬픔조차 살아있음의 증거로 표현한다. 슬픔은 아프고 회피하고 싶은 감정으로 느꼈다. 자신의 마지막 상황을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슬픔마저 표현한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으로 마무리하고 그 마음을 나누며 작별하는 과정에서 눈물이 난다.


인간 안에 깊숙이 담긴 영성에 자리 잡은 선함이란 녀석이 드러날 날이 올까? 그러려면 살아있는 동안 욕망과 감정을 인식하고 비우고 덜어내야 한다. 너무 채워져 있어 보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지경이다. 느껴야 움직이는 게 감동이라고 한다. 나도 비우고 덜어내려면 스스로 느껴야 한다. 무엇을 느껴야 할까?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내 안에 욕망과 감정의 실체를 보자! 그 밑바닥까지 가면 자기다움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선함과 인간다움을 추구하며 살고 싶다. 컵 속에 담긴 실체를 보기 두려워 회피하기보다 볼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회칠한 무덤처럼 가리고 덮어 씌운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럴수록 드러내고 보아야 한다. 마음에 노크를 하고 이제 서서히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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