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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모 비아토르 Feb 01. 2022

삶과 마주하는 감정 쉼표

두려움의 실체는 코로나일까?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7783.html#cb     

강우일, “[강우일 칼럼] 두려움을 이기는 길”, 한겨레신문, 202117

* 굵은 글씨로 밑줄 그은 부분은 기사 내용 그대로 인용한 문장입니다.


두려움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다면 두려움 때문에 무력해지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     


개인이든 집단이든 사람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두려움의 사전적 정의는 위협이나 위험을 느껴 마음이 불안하고 조심스러운 느낌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신체적, 심리적으로 해를 당할 것이라는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 위험을 회피하고 생존 지향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하는 매우 불쾌한 정서이다. 두려움은 자기 보호 장치이다. 두려움은 사람마다 다르고, 때와 상황에 따라서는 집단적으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오늘은 두려움을 느끼는 여러 상황 가운데 일반적으로 느끼는 죽음의 두려움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철학자들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내던져진 존재라고 할 정도로 우리는 매 순간 죽음과 대면하며 살아간다. 죽음을 생각하면 공포, 두려움의 감정이 연결된다.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여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때가 되면 죽는다. 단지 그때를 모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질병이나 사고가 없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당장 내일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매일을 산다. 한마디로 죽음을 망각하는 존재이다.     

 

강우일 신부는 생애 여러 길목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 6.25 전쟁에서의 피난길, 전선에서 실려 온 부상병들, 초등 3학년 때 한 달 동안 열병을 앓고 사경을 헤맸던 일, 중학교 3학년 때 4.19에서 시위를 하다 죽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들을 옆에서 직접 목격했던 일, 설악산 등산에서 고립되어 죽음의 두려움을 경험했다.

강우일 신부는 “죽음이란 언젠가 모두가 필연적으로 가야 하는 길임을 아무도 의심치 않는다.”라고 말한다.      


코로나 감염증과 관련된 정보와 소식은 좀 과하게 느껴질 정도로 날마다 수시로 전달한다. 지난해의 코로나 전체 확진자가 6만여 명이고, 세상을 떠난 이는 900명 정도다. 2019년 독감을 앓고 진료를 받은 사람이 54만 명이 넘었고 사망자가 720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코로나에 대한 현재의 두려움, 불안, 고립, 우울증세는 왜 이렇게 유별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코로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다. 내가 어떤 상황과 입장이냐에 따라 코로나에 대해 다르게 반응하고 해석할 수 있다. 코로나 자체의 두려움은 강우일 신부의 말처럼 미디어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실시간으로 보도되는 확진자수는 불안을 자극하고 두려움을 준다. 거기에 더해 전염병이라는 말 자체가 ‘혹시 나한테도 전염되는 거 아니야?’는 불안을 높인다.      


한편으로는 코로나로 파생되는 어려움으로 인해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든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전염병 치료를 위해 애쓰는 의료진들, 전염병 확산 및 예방을 위해 힘쓰는 공무원들이 있다. 또 다른 면에서는 방역으로 인해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영업자, 관광업계의 사람들이 있다. 더 나아가 오프라인에서 소비를 못하다 보니 택배물량이 급속도로 증가하여 과로사로 죽어가는 택배노동자도 눈에 띈다. 얽혀있는 그물망 같은 관계에서 누가 승자이고 패자인지 판단이 안 선다. 단지 다들 기진맥진해서 죽어나가고 있는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정말 죽음의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하고 있는 걸까?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건 내가 직접 전염병에 걸렸다는 두려움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이 단절되고 고립되는 것이다. 코로나 이전에 일상으로의 회복이 불가능한 그 상태이지 않을까?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코로나 확진자 수, 코로나 변이 오미크론... 현상만 보고 있다면 우리는 미디어나 사람의 말에 쉽게 미혹되어 넘어질 수 있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울며불며 살고자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곳곳에 있다. 단지 그들은 미디어의 관심 밖이다.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문구로 사람들의 눈길 끌기를 시도한다. 미디어의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볼 것이냐? 아니면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이 떠져 정작 바라봐야 할 곳을 제대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지구 생태계는 아득한 영겁의 세월을 두고 조금씩 공들여 빚어낸 창조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작품이지만, 그중에서 인간은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최고의 솜씨와 사랑으로 창조된 걸작 중의 걸작이다. 창조주께서 그토록 오래 준비하시고 빚으시고 가꾸신 걸작을 함부로 쓸어버리지 않으리라. 지나친 두려움은 허구다. 

지나친 두려움은 허구일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다시 재 정의하고 싶다. 지나친 두려움은 병이 된다. 과도한 두려움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우리는 어떤 위험과 위협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숨거나 회피한다. 그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작동한다. 두려움은 정상적이고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반응이다. 그 감정을 섣부르게 정죄하거나 판단하는데 조심했으면 좋겠다.


정작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사람 앞에서 “너는 두려움이 지나쳐. 그만 좀 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두려움이 없어질까? 아니다.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두려움은 커질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는 그 사람과 어떤 이유에서 두려움을 느끼는지 소통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두려움을 느낄만한 이유는 분명히 있다.      


칼럼을 읽으며 코로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 각자 다름을 확인했다. 죽음의 두려움이라고 느끼는 코로나를 너무 지나친 두려움으로 봐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코로나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누군가에게 그 감정을 함부로 축소하거나 억제시켜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코로나 전염병은 사실이지만, 각자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심리적 현실은 다 제각각 다르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들어줄 수 있는 열린 두 귀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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