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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모 비아토르 Jan 31. 2022

삶과 마주하는 감정 쉼표

왜 내가 미울까? 

평상시 나는 명랑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사람들의 유별난 말에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기는 편이다. 그러나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컨디션의 난조에 빠지거나 상태가 안 좋을 때는 그러한 평소 태도는 온 데 간데  없어진다. 


사람들 앞에서 매우 관대하고 온유한 척 연기를 해보지만 그건 진짜 내가 아니다. 한 번씩 나 자신을 보면 가식적이라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마치 연극무대에서 연극을 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생각의 꼬리 끝에는 자기혐오와 타인들의 시선이 싫어지기 시작한다.     


자기혐오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 자기 자신을 극도로 증오하거나, 자기 자신을 싫어하며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감 내지 선입견에 빠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자기혐오를 더 깊이 들여다보자.      


“자기혐오는 자기중심의 다른 말이다. 자기혐오에 빠지면 본인 외에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을 적절히 보살피고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해진다. 내가 불행하면 내가 하는 모든 못난 행동이 용납된다고, 적어도 이해받을 수 있다고 억지로 믿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내가 희생자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내가 불화의 원인이고 불행을 퍼뜨리는 사람이다.”
로버트 판타노, 『다만 죽음을 곁에 두고 씁니다』, 188p  

   

자기혐오는 자기중심적이고 희생자이며 불행을 퍼뜨리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콕 박힌다. 그냥 나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 자신을 싫어하고 못마땅할 뿐인데, 타인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자기혐오에 빠지면 나에게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 나를 들여다보기로 하자. 

첫째, 내가 싫어진다. 무엇을 해도 다 싫다. 그냥 내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싶다.

둘째, 세상이 못 마땅해 보인다.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세상도 삐딱해 보이고, 타인들의 시선과 말, 행동에 굉장히 예민해진다. 

셋째, 사람들의 무조건 긍정적인 피드백인 칭찬, 인정의 욕구가 높아진다. 그러나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나는 좌절하고 상심에 갇히게 된다. 이것은 자기 존재의 확신이 없는 상태이다.  

넷째, 나와 타인에 대한 기대와 기준이 높다. 앞서 둘째와 연결된다. 현실적으로 채울 수 없는 높은 기대와 기준을 세운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불만족이다.

다섯째, 사고가 경직되고 엄격하다. 나와 타인이 내가 세운 기준과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화가 난다. 어떤 예외도 허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섯째, 내가 희생자라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이렇게 힘들고 안 좋은데 사람들은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 미워진다. 사실 누구나 자기만의 문제와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그 상황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 결국은 나만 알고 타인을 전혀 보지 못하는 이기주의자가 된다. 

어제와 오늘은 동일한데 나의 마음만 갈팡질팡한다. 나도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진다. 세상에서 나 혼자만 불행하고 힘들다는 왜곡된 생각이 올라온다. 

     

자기혐오와 타인 혐오는 자존감 부족이라는 뿌리를 공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략) 본인이 생겨 먹은 그대로 본인을 존중하고 받아들이지 못할 때, 사람은 스스로가 가진 것들에 불만을 품게 됩니다. 그에게는 어떤 높은 기준이 있어 그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 스스로는 ‘부적합한 존재’입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미움의 근본적인 이유는 ‘대상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못함’에 있습니다.
박다빈, 『나 자신을 고스란히 소중하게: 보통 사람의 자존감 공부』   

  

위에 내용처럼 자기혐오는 타인 혐오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뿌리는 낮은 자존감과 연결된다. 낮은 자존감은 나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데서 시작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자기혐오를 정리하고 나니 나 자신이 보인다. 내 모습이 슬퍼진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은 모습만 인정하고 괜찮지 않은 부분은 외면했다. 나의 전체 모습에서 일부분만 수용하고 아직 외면하고 통합하지 못한 괜찮지 않은 자아가 있었다.       


나의 실체는 컨디션이 괜찮을 때 드러나지 않는다. 나의 상태가 바닥을 칠 때 내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진짜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불편하고 짜증 나고 고통스럽다. ‘내가 왜? 내가 자존감이 낮다고?’ 지금까지 정리한 내 모습이 허점이 있을 수 있고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그래, 맞아. 그랬던 거야.’라는 울림이 온다. 슬프지만 지금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나의 낮은 자존감을 건드린 사건, 감정, 생각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 묻는다. ‘이런 괜찮지 않은 나도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겠니?’     


결국은 자기혐오가 타인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알고 있기에 숨는다. 어디에 숨느냐고? 사실 숨을 곳은 없다. 심리적으로만 숨을 곳을 마련한다. 그것은 나만의 심리적 동굴이라고 부른다. 평소에도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면 에너지 소모가 많아 적당한 선에서 만남을 정한다. 그러나 자기혐오 상태가 되면 가급적 사람 만나는 것을 피한다. 사람을 만날수록 나와 타인이 더 미워지는 감정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매일 반복하는 고정 루틴에 집중한다. 고정 루틴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로 나눠진다. 하고 싶어서 하는 고정 루틴은 걷기, 독서, 글쓰기, 말씀묵상, 기도 등이다. 해야 할 일은 아이들 학습지도, 신앙훈련, 집안일 등이다. 삶을 단순화시킨다. 세상의 시끄러운 잡음 같은 상황은 최대한 음소거하고 조용하고 고요한 일상을 지켜나간다.  


이런 상황 속에 갑자기 약속이 잡히거나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화가 난다. 화가 나는 내 모습을 보면 ‘아, 내가 정말 상태가 안 좋구나.’를 감지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마음을 본다. ‘뭐지? 뭐가 그렇게 화가 날까?’ 내 안에서 그 감정이 해결이 안 되면 저녁때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한마디 툭 던진다. “여보, 나 요즘 컨디션이 안 좋아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계속 예민하고 우울해요.”라고 말한다. 말하고 나면 해결은 안 되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아이들에게도 거리두기를 요청한다. 아침마다 두 자녀들과 그림동화 한 권을 한 바닥씩 돌아가며 읽는다. 요즘은 반복해서 앤서니 브라운의 “기분을 말해봐”를 읽고 있다. 우리의 감정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분 표현인 기분 온도로 말한다. “얘들아, 오늘 엄마 기분 온도가 80도야. 그래서 조심해줘.” 평상시 기준은 50도 전후이다. 그 이하로 내려가면 우울이고 100도에 가까울수록 미움, 화, 분노를 표시한다. 아이들은 내 말을 바로 알아듣는다. 아이들 역시 자신의 기분을 기분 온도로 얘기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배려한다.       


나는 왜 동굴에 들어갈까? 낮은 자존감으로 자기혐오에 빠지면 나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외관상 일상을 유지하고 단지 만남을 줄이는 모습으로는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면에서는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는 태풍이 몰아치고 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일상을 굳건히 유지하며 내면을 살핀다. 이때는 감정의 센서등이 예민하게 발동한다. 드라마 대사처럼 “이런 나도 괜찮겠니?”라고 자기 자신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래, 지금의 너도 너야. 괜찮아.”라는 말을 듣고 싶다.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러나 그 욕구를 타인에게서 충족시킬 수 없음을 안다. 오직 내 안에서 내가 충족시켜줄 수 있다. 그것이 진정 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의 태도이다. 외부에서 나의 부족한 부분을 메꾸려 하면 할수록 내면에 공허함이 몰려온다. 공허함이 몰려올수록 그 공허함을 회피하기 위해 뭔가에 몰두하거나 삶을 더욱 분주하게 만든다. 그러나 다시 시간이 멈추면 공허함은 다시 찾아온다.      


여기서 자기혐오의 뿌리인 낮은 자존감을 가진 나와 대면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공허함이 찾아올 때 허한 마음을 들여다보자. 그 감정을 피하지 말고 마주하자. 모자라고 부족한 자기를 바라볼 때 눈을 감지 말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과는 마주할 용기가 없어 피할 때가 많다. 지금 내가 필요한 것은 자기혐오를 이용해 나를 둘러싼 불편한 요소들을 방패 삼지 말고 직면하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불완전하고 취약한 인간이다. 억압하거나 통제하지 말고 제3의 관찰자 시점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나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인간다움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내면에서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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