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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모 비아토르 Feb 03. 2022

삶과 마주하는 감정 쉼표

감정의 여정

나는 언제부터 내 속에 있는 감정을 인지하고 있었을까? 나무를 비유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보자.


나무는 숲 속에 산다. 숲 속에 있는 나무는 다른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비를 맞는 모습을 본다. 나무는 늘 옆에서 보는 다른 나무와 동일하게 자신을 인식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나무는 어른이 되었다. 나무는 다른 숲 속 친구들에게 숲 속 생명체와 숲 속 세상 밖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비로소 나무는 다른 존재에 비추어 자신의 모양과 기질을 알게 된다. 나무는 이 숲 속에 여러 가지 종류의 나무가 있고, 생김새와 특징이 다르며 이 숲 속 밖에서는 전혀 한 번도 보지 못한 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나무는 나이다. 나는 태어나고 어느 순간까지 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당연히 존재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니 감정이란 것도 알지 못했다. 어른이 되어 세상에 나와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거울효과처럼 상대방의 감정표현을 통해 나를 보게 되었다. 상대방의 감정을 보게 되는 것으로 끝나면 더 이상 진전은 없다. 그 감정을 아는 과정이 필요하다.      


아기는 태어나 기본적인 생존을 책임지는 어머니와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한다. 지금 내 앞에서 모유를 주고, 똥을 싸면 기저귀를 갈아주고, 짜증을 내면 업어주는 사람을 다른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고 나의 한 부분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나와는 다른 존재로 주 양육자를 분리해서 바라본다. 점차 한 사람의 인격체로 독립하는 과정을 거친다. 영유아기 때 웃고, 울고, 짜증내고, 삐지던 기억이 잠깐씩 스친다. 기분 표현을 했고, 그것이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란 개념을 몰랐기에 감정이라고 정의 내리지 못했다.   

   

내 속에 늘 가지고 있고 표현하고 있다 해도 감정을 인지하지 못했다. 마치 늘 입고 있는 옷처럼 익숙할 뿐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무지했다. 그것을 개념화하고, 감정을 감정으로 이해하기까지 성장과 배움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감정은 언제부터 인지했을까? 사춘기 시절 많이 예민하고 날이 선 말로 부모님께 상처를 주었던 나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냥 내 기분이었고, 내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것뿐이었다. 이것에 대한 어떠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없었다.      

사회복지학과를 전공하고 도움이 필요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이야기했다. 조금씩 저들을 통해서 감정이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감정을 화두에 두고 공부한 것은 정신건강사회복지사 수련 과정이었다. 상담을 하고 프로그램 진행을 하며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필수였다. 감정을 살피는데 서툴렀던 나는 내담자들 앞에 서는 게 두렵고 자신이 없었다.      

그때 비로소 감정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감정을 다루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감정은 공부로만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감정을 이해하고 인지하고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은 지속적인 연습과 훈련이 필요했다. 감정은 예전 습관처럼 돌아가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감정을 억제하고 조종하려 하고 건강하지 못한 감정표현을 시도하려고 한다. 그때마다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은 부단한 연습이었다. 새로 습득된 감정 이해, 인지, 감정표현을 꾸준하게 내 삶에 적용했다.      

어느덧 나이 마흔이 넘어 태어날 때부터 나와 함께한 감정의 여정을 돌아본다. 너무 어릴 때는 그 감정이란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사춘기 시절 감정은 대략 알 것 같긴 했으나 내 기분대로 함부로 감정을 표현했다. 20대 중반이 넘어 수련과정에서 감정을 직면하고 그 존재를 인식했다. 부끄럽지만 감정을 인지하지 못했던 20대 중반 이전에 만났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나의 서투른 감정표현으로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미안함마저 든다.         


감정을 알고 이해한다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감정을 다루는데 서투르다. 감정을 다루는 것은 기술이 아니다. 나의 정신건강 상태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반복한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쉽게 감정을 이해하고 건강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한 마리의 괴물을 다루듯이 감정을 통제하고 강요하고 억압하려 한다. 결국 알면서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다. 안다고 다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건강 상태를 살펴야 한다. 분주하고 바쁘면 놓치기 쉬운 게 정신건강이다. 눈에 보이는 육체적 건강은 잘 챙길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간과하거나 방치된다. 정신 건강이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업무를 완수할 수 있고, 일상생활에서 겪는 스트레스에 적절히 대처하며 지역사회에서 효과적이고 생산적으로 활동하고 기여할 수 있는 감정적ㆍ정서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말한다.  

    

정신건강과 감정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정신건강 상태가 양호할 때 건강하게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지금의 내 감정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것이 양호하더라도 미래에 반드시 괜찮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생애주기에 거쳐 겪게 되는 변화와 예기치 않는 위기는 감정의 널뛰기를 하게 한다. 그렇다고 미래까지 염려하며 현재를 살 필요는 없다.      


오로지 ‘지금 여기서’의 나의 감정과 함께하면 된다. 감정이 힘들다고 호소하면 ‘참아. 그만 좀 해’라고 말하지 말고, ‘그래, 힘들지. 얼마나 힘들겠어.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니?’라고 수용해주고받아주면 된다. 지금까지 감정은 삶의 구석진 곳까지 늘 그림자처럼 함께했다.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했든지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감정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마음은 조금 더 편안해졌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전집』, 현대문학, 2004, 178p     


감정이 마치 꽃을 연상시킨다. 꽃을 감정으로 바꾸어 시를 재구성해 보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감정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감정을 읽어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감정을 공감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공감받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존재가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의 꽃이다. 존재의 꽃 속에 깃들어 있는 감정을 불러줄 때 비로소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넨다.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감정이 되고 싶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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