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모 비아토르 Feb 06. 2022

삶과 마주하는 감정 쉼표

억울함과 원망을 용서로 승화한 “요셉”

성경 속 인물 중에 마음에 남는 인물이 한 명 있다. 그의 이름은 요셉이다. 그를 흔히 ‘꿈꾸는 요셉’이라고 부른다. 야곱의 열한 번째의 아들이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어릴 때부터 꿈을 꾸었다. 꿈의 내용은 자기의 형제들이 요셉에게 절하고 칭송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요셉에 대한 아버지의 편애와 꿈 이야기로 형제들은 요셉을 더 싫어하게 된다.     

  

그를 질투한 형들이 17세였던 요셉을 이집트의 노예로 판다. 파라오의 근위대장인 보디발의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총명하고 정직하게 일을 하여 주인의 신임을 얻게 된다. 나라면 억울하게 노예로 팔려간 것도 우울한데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좌절감에 빠질 것이다. 거기다 형들에 대한 원망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상한 마음을 부둥켜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요셉은 자기 상황에서 성실과 충성을 다하였고 하나님과 늘 함께하는 자라고 인정을 받는다. 성경은 형통한 삶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라고 말한다.      


인생에서 형통한 삶의 기준은 뭘까? 형통하다는 사전적 의미는 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간다는 것이다. 즉 물질, 권력, 건강, 지위에서 모든 일들이 잘 풀린다는 의미 한다. 성경은 그 모든 것을 배제하고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늘 함께하는 것이 형통함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납득하기 힘든 말이다. 내 눈으로 봤을 때 요셉은 전혀 형통하지 않다. 주야장천 고난과 고통이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성폭행하려 하지만 뿌리치고 도망간다. 보디발의 아내는 오히려 요셉이 자기를 성폭행을 시도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 이유로 요셉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지만 가는 곳마다 억울한 상황이 생긴다. 다시 또 좌절이다.


생각해보자. 내가 하지도 않은 죄의 대가를 받아 감옥에 가야 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나를 감옥에 보낸 사람을 평생 저주하고 욕하며 내 인생을 미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요셉이 자신을 감옥에 보낸 사람을 미워하거나 원망했다는 말이 없다. 요셉은 눈에 보이는 절망 가운데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마음속에서 빛나는 희망이란 게 있었을까?   


요셉은 감옥에서 직원들의 신임을 얻게 되어 중요한 일을 맡게 된다. 감옥에서 만난 왕의 측근에게 꿈을 해몽해주어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그 사람은 그 부탁을 잊어버린다. 몇 년 후 왕이 꿈을 꾸면서 그 꿈을 해석할 사람이 없게 된다. 감옥에 갇혔을 때 요셉이 꿈 해석을 해준 것을 기억한 사람은 30세였던 요셉을 왕 앞에 서게 한다. 요셉은 왕의 꿈을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을 해석한다. 꿈 해석을 칭찬하자 요셉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한다. 요셉은 왕 다음의 권력자인 국무총리에 임명되고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맡는다.      


요셉은 고난과 역경을 거쳐 결국은 성공으로 마무리한다. 내가 요셉을 좋아하는 이유가 마무리가 해피엔딩이어서 일까? 전혀 아니다. 동화에서처럼 마무리가 늘 아름답게 끝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저 요셉의 살아온 인생의 과정을 본다.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받는 동시에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았던 요셉이 노예가 되고 억울한 옥살이를 거치면서 그가 취했던 태도에 인간의 성장과 성찰이 어떤 것인지 보게 된다. 성장이란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돌아볼 수 있는 눈은 어디에서 나올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를 노예로 판 형제들을 죽도록 미워하고 원망했을 것이다. 중독에 빠져 현재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회피할 수 있었다. 요셉은 억울함과 원망을 선택하지 않았다. 요셉은 자기의 주어진 상황에서 신의 은총을 믿었고 늘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함을 느끼며 살았다. 사람들은 버려도 하나님은 자기와 함께한다는 것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기나 주위 상황을 탓하지 않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그 삶을 살았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지 않았더라도 나는 요셉에게 주목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은 예기치 않은 상황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내일 일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행복한 일만 있어도 모자랄 인생에서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팔려가고 억울함을 당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요셉처럼 신의 은총과 사랑을 믿고 묵묵히 주어진 삶을 살 수 있을까? 확신을 할 수가 없다.

나도 인간인데...

나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넘어지는 나약한 인간일 뿐인데...


인간으로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신은 신실하기에 연약한 내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운다는 것을 요셉을 통해 본다. 알라딘에서 항아리를 만지면 지니가 튀어나와 소원을 들어주는 게 신이 아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실제적이고 일상의 삶 속에 들어와 있다. 내가 어떤 상태이든 나와 늘 함께하는 존재이다. 나의 고통과 행복 속에 함께하며 위기와 갈등 속에서 선한 길을 갈 수 있게 한다.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비극일지 희극 일지 결정된다. 그것을 바라보는 눈을 타인이 아니라, 나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렌즈를 맞추려고 하면 인생에 자기가 없고 주변 인물만 남게 된다. 그들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그들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된다. 결국 자기는 타인에 의해서 희생된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중하기보다 그 현상 밑에 존재론적이고 실재적인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어야 한다. 요셉을 통해 신의 은총을 본다. 고단한 인생길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 인생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공평하지 않다는 것. 그 인생에 너무 감정을 쏟으며 사람과 상황에 목숨 걸지 말 것. 삶에서 나다움을 지켜내며 진실하고 성실하게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마음에 담는다.   

     

나는 현재 자가 격리 대상자이다. 요셉과는 견주지 못할 정도로 아주 약한 일상의 위기가 왔다. 첫째 아이는 학원 발 집단감염으로 코로나 확진자, 나와 둘째 아들은 공동 격리 대상자이다. 남편은 출근을 위해 2주간 고시텔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우리 셋은 코앞인 설도 재껴두고 꼼짝없이 14일 동안 집안에 갇혀 지내야 한다. 처음 이 소식은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이었다. 어떤 원인이고 누구의 영향인지 찾고 싶었다. 금세 그 마음은 잠잠해졌다.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전염병을 왜 나만 걸리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의 자만이었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라는 어리석음이었다.      


2주 동안의 격리기간을 다른 눈으로 보기로 결정했다. 복직하면 붙어있고 싶어도 함께하지 못할 아이들과의 시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아플 때 마음껏 24시간 케어해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며 바라보고, 배려하며 함께하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로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나는 여전히 두렵다. 한편으로는 자가 격리 기간이 점차 익숙해지면 그곳에서 성장과 성찰의 기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요셉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선한 의지를 가지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이 시간들을 살아 내리라 다짐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삶과 마주하는 감정 쉼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