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평범한 미라클 하루

8. 듣기

by 호모 비아토르

대화를 할 때마다 하나의 습관이 있다. “뭐라고 하셨는지 한 번 더 말씀해주시겠어요? 이런 의미인가요?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건가요?”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제대로 이해를 했는지 재질문을 통해 확인을 한다. 아마도 상담과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쌍방향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듣기를 못했거나 이해를 못 하고 넘어갔을 때 관계에서 생길 오해와 갈등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한 번 더 질문을 하거나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넘어가는 번거로움이 더 나을 수 있다.


한참 젊을 때 듣기는 그저 상대가 하는 말을 듣는 것이었다. 듣기의 의미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상대방과 오해가 생길 일도 있었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판단했다. 나는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사오정은 아닌지 걱정을 했다. 어느덧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듣기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창조적 경청의 힘을 알게 되었다.


창조적인 경청은 듣는 사람이 상대방이 말하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John A.Sanford, 『만남, 대화 그리고 치유』, 하나 의학사, 1994년, p29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이 경청이라고 하면 나는 들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반복되는 일상에서 매일 부딪히는 가족들에게 나는 어떤 경청의 자세를 가지고 있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란 존재가 우습다고 느끼는 게 여기서 발견된다. 밖에서 사람을 만날 때는 상대방을 의식하며 되도록 주의 깊게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집에서 자녀들에게는 특별히 이중 잣대를 제시한다. 자녀는 인격적인 존재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삶이 바쁘고 헝클어져 있을 때 그 생각은 온데간데없다. 오로지 내 말만 집안 가득 채워진다. 창조적 경청은 둘째치고 아이들 소리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불통의 현장이다. 창조적인 경청이란 단어를 쓴다는 게 부끄럽고 낯 뜨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기에 대해 글을 쓰는 건 어떤 이유일까? 아마도 평소에 내가 잘하지 못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창조적 경청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훈련이다. 계속되는 연습을 통해 듣는 것이 나아지는 것이다. 이론적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나아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 마음의 문제이다. 밖에서는 잘 보이고 싶은 사람 혹은 직업적 역할로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에서는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해야 하는 경청을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 자신을 속이지 말자. 솔직히 말하면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진실이다. 귀찮았고 그 상황을 인내해야 하고 나 자신을 훈련하기 싫었던 것이다. 바쁜 아침, 약속시간이 빠듯한 어느 오후에 나는 내 말만 하고 아이들 앞에서 안개처럼 사라진다. 나도 안다.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내 마음은 계속 아이들에게 화살을 돌리고 나 자신은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듣기는 시작되어야 할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내 안에 목소리부터 들을 수 있는 조용하고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 내 목소리도 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요즘은 일부러 나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는다. 멍 때리기를 한다. 굳이 어떤 생각을 하려고 애쓰지 않고 그냥 지금 이 순간에 몸과 마음을 맡겨본다. 그럴 때 비로소 거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보이고 푸른 하늘이 보인다.


그다음은 가족들이다. 그중에서도 서열 체계에서 가장 약한 자녀들이다. 자녀들은 인격적으로 대한다고 하면서 마음이 분주하고 급할 때 제일 함부로 대하게 된다. 미디어에서 갑을관계를 따질 때 욕하던 내가 정작 자녀들에게 갑을관계를 맺고 있으니 웃긴 일이다.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즉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듣기는 타고난 것이 아니기에 처음부터 잘할 수 없다. 매일이 연습이고 점점 나아질 거라는 기대로 한 발자국씩 내딛는다. 아이들과의 시간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꾸 내가 통제하려고 든다면 내 목소리만 커지고 나아질 기미는 안 보인다. 들을 준비가 되었다면 그다음은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다. 아이들과 여유 있게 함께할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려면 주어진 시간을 잘 써야 한다. 매일 스케줄에서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짜임새 있게 나눠야 한다. 아이들과 있을 때 그 스케줄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내가 변해야 비로소 듣기는 시작된다.


나에게 듣기란 무엇인가? 듣기는 상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시작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 속에 무장해제를 하고 상대가 익숙한 언어에서 낯선 여행을 한다. 처음에는 낯설어 뭐가 뭔지 모르다가 어느덧 익숙해지면 그 세계 속에 빠져든다. 때론 불편하고 거부감이 들어 금방 그 세계에서 벗어날 때도 있다.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세계가 있고 반대로 익숙하지 않은 세계가 있다. 점차 나이가 들수록 익숙하지 않은 세계는 처음부터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냥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러나 앞서 살아간 사람들은 익숙한 세계보다 익숙하지 않은 세계로 가라고 한다. 그곳에 인간의 성장과 사고의 확장이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듣기는 익숙하지 않은 세계로 한 발짝 나아가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진정한 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생의 불안정을 맛보는 데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스캇 펙, 『아직도 가야 할 길』, 열음사, 2004년, 196p



예전 기억을 떠올려본다. 그는 정신보건센터에 불안장애로 매주 1회 상담을 했다. 대략 1년 동안 꾸준히 상담을 이어갔다. 상담 시기가 중반 정도 지났을 때 그가 겪는 심리적 어려움과 증상이 반복된다고 느꼈다. 상담이 1년이 지난 어느 날 그가 마음속 깊이 꽁꽁 숨겨놓은 자신의 비밀을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 자신에게 한방 맞은 느낌이었다. 사람을 안다는 건 무엇일까? 내가 지금 안다고 하는 것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의 세계는 입체적이고 다층 면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치 깊은 우물을 파는 것처럼 알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이 보여준 한 부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섣불리 듣고 판단하거나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고통과 상처를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로 여기고 평생의 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깝다고 자신의 속내를 다 말할 수 있을까? 내가 그들의 주위에서 마음을 열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상대방은 입을 닫는다. 겉 돌기식의 대화만 이루어질 뿐이다. 내가 들을 준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속에 올라오는 생각과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

듣기에 대한 글을 쓰고 보니 듣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말 그대로 듣기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듣기는 나와 타인을 연결시켜주는 끈과 같다. 그 끈을 꼭 붙잡고 가다 보면 타인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나에서 타인으로 확장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려면 타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기다림과 타인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이 듣기의 출발점이다. 아이들이 다 빠져나간 이 공간에서 하교 후 집안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시끌벅적하고 통제 불능, 너저분함이 깃드는 이곳에서 다른 무엇보다 아이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나도 아이들의 마음에 소리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듣기를 통해 내가 모르는 아이들의 깊은 우물 속 마음을 길어 올려보고 싶다.

출처: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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