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바위

by 범고래

화창한 날이다.
간밤에 쏟아진 폭우는 잠드는 귓가에 머물다가 꿈속으로 잦아들어 가만가만 내 가슴을 적셨다. 창문을 활짝 열고 비에 씻긴 아침의 싱그러운 얼굴을 본다. 밤새 우두커니 서서 거센 비를 맞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키 큰 아카시아 나무는...

세수를 하다 말고 거울 속의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내 곁에 있는, 결코 나를 떠나지 않는 친구인 것만 같다.

가방을 챙겨 들고 카페로 간다.
앳된 얼굴의 파트타임 직원은 일이 서툴러 미안해하고 나는 그 서툰 마음을 응원하고 싶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마주 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들고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는다. 카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시간을 뭉개는, 카페가 싫어하는(?) 부류라 구석지고 보이지 않는 자리가 편하다. 털썩 자리에 앉으며 한숨을 푹 쉬고 책을 꺼내 찬찬히 읽는다.

바로 옆자리에서는 젊은 남자와 중년의 남자가 마주 앉아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
자리가 너무 가깝다.
대화 내용이 너무 속속들이 들려서 조용한 머릿속을 침범해 마구 휘저어 놓는다.

대학시절이 생각난다.
선배는 나에게 대학시절 나를 떠올리면 가을 낙엽이 생각난다고 했다. 풀풀 날리는 낙엽을 뒤로하고 걸어가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나.
로맨틱했다나.

으음, 그건 아닌데...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던 그 시절.
난 수업도 잘 들어가지 않고 좁은 방에 누워 그저 얼룩진 천장을 바라보며 종일 누워 있었다.
사실 그렇게 아픈 상태였다는 것도 모르고
그냥 시끄럽고 정신없는 세상에 등을 돌리고 죽은 듯 잠만 자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관 속 같은 작은방에 누워 생명이 없는 사물처럼 누워 있으면 정말 죽은 게 아닐까 가만히 누워있다가 살그머니 삶의 경계를 넘어 죽음의 세계로 간 게 아닐까 하는 흐릿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느 날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뭘 알고 온 건 아닌 것 같고 혼자 사는 내방을 알고 주어진 전도는 해야 했기에 찾아온 것이었다.
어쩌면 나의 문제를 알 수 있을까 싶어 따라다니며 성경공부도 하고 교회도 다녔었다.

오래전 기억들이다.
여기에 해답이 있다 여기로 오라 내가 너의 모든 의문을 풀어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곳들을 찾아다니던 그 시간들.
쌓이고 쌓인 시간들은 단단한 바위처럼 견고하게 '세상 어디에도 해답은 없어. 인생의 질문은 궁금해도 하지 않는 게 좋아. 그저 하루하루 평온한 마음으로 잔잔히 살도록 해. 억울해하지 말고 분노하지 말고 다 용서하고 사랑해' 하며 묵묵히 말했다.
그리고 폭포처럼 쏟아내는 질문들에도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아버린다.

오늘 하루 평화가 감사하다. 세상이 다 평화롭진 않지만 지금 여기 이 순간 머물고 있는 평화에 감사해.
온 데가 다 아프지만 걸어서 이렇게 예쁜 카페를 찾아올 수 있는 오늘의 건강에 감사해.
이런저런 많은 문제가 있지만 이만하길 다행이야.

시간의 바위가 조용히 내 귓가에 들려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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