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시간이 빨리 흘러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들 오래 살고 싶어 하는데 말이다
엄마가 살아있을 때 엄마는 흘러간 청춘을 아쉬워하며 십 년 만 젊었어도 좋겠다는 말을 내 앞에서 탄식하듯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나는 내 남은 시간의 반을 싹둑 잘라 주고 싶은 간절함이 생겨났다. 십 년을 주고 또 십 년을 주다 보면 엄마보다 남은 시간이 짧아지겠지 그러면 이 무거운 시간의 굴레에서도 벗어날 수 있겠지.
할 수만 있다면 꼭 그렇게 했을 것이고 그럴 수 있었다면 엄마는 아직도 살아있을까.
십 년이 젊어진 엄마는 무엇을 했을까 내가 알기로 엄마의 삶은 너무나 고달프고 가난하고 우울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오래오래 살며 그 삶을 끌고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관성일까
삶은 확실히 관성을 가지고 있다.
살던 대로 그냥 죽 계속 살아질 것만 같아서 날마다 옆에서 누가 죽어나가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듯 느껴지고 나만은 영원히 살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느껴진다. 생존본능 때문인지 뭔지 사실을 기만하는 뭔가가 우리 안에 있다.
언제 죽을지 안다면 사람들은 삶을 좀 다르게 살아갈까
다르게 산다면 어떻게 다르게 살까
남은 시간이 적은 사람은 주변을 정리하고 무심했던 마음을 돌려 사랑을 표현하고 나누며 살아갈까
아니면 열심히 살다가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아쉬워 흥청망청 쾌락에 빠져 살려나
어느 쪽이든 살아있는 동안 인간은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시간이란 건 없는 건지도 모른다.
별을 보고 해를 보며 우주 속살에 섞여 살아가던 인간이 어느 날 하늘을 한번 힐끗 보고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것은 뉴턴의 사과보다도 더 대단한 발견이었다. 존재함이 발견된 순간 천기누설의 대격변이 일어났고 그것은 신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존재함'을 '시간'이라 이름 붙이고 목줄을 채워버린 그 순간부터 인간은 공기처럼 가볍고 자연스러웠던 삶이 바윗돌처럼 마구 밑으로 구르는 경험을 했다.
신이 관장하던 영역에 침범해 시간을 조각조각 나누고 통제하며 오히려 시간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시간의 목에 걸려있던 목줄은 어느새 인간의 목에 걸려 있었고 해와 별은 예전처럼 아름답지도 고요하지도 않았다.
밤과 낮이 혼란스럽게 뒤섞이고 그 어느 때도 조용한 시간이 없어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까다롭고 부담스러운 본성을 드러내며 더 이상 추상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만지면 만져질 것같이 물질적인 무엇이 되었다.
시간과 잘 지내기는 정말이지 어렵다.
고요하다가도 출렁거리고 충만하다가도 권태로웠다.
어느 날은 가볍다가도 어느 날은 너무 무거워 삶 속에 고통이 느껴졌다.
우주 안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는 시간은 무수한 생명을 그 안에 품고 있는 탯줄과 같다. 끝없이 잉태하고 출산하며 우주를 생명으로 가득 채운다.
그 안에서 우주와 신의 섭리와 연결된 인간의 삶은 생각해 보면 가슴 뛰게 충만한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마음에 품고 산다면 남은 시간들을 더 이상 학대하며 살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내 생명의 어머니는 우주이고
나는 신비롭고 고귀한 우주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