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젤의 삶

약자의 설움

by 범고래



다시 태어난다면 난 사나운 사자로 태어나고 싶다. 살아보나 여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뭘 좀 할래도 거센 사람들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뭔가를 만들어 낼 만한 공간도 기회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뒤에는 찌그러지고 깨진 내 모습만 깡통처럼 남겨졌다.
어릴 적 내 마음에 누군가 새겨놓은 정직한 삶의 자세와 태도는 어느 순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거치적거리고 신경 쓰이는 가시로 느껴졌다.

잽싸고 순발력 있게 낚아채지 않으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삶의 기회들.

만일 그런 것들을 눈앞에서 놓쳤다면 그것은 나의 무능력이기도 했겠지만 나누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속 울림에 멈칫한 순간의 망설임도 한몫했을 것이다.

영리하고 야무지지 못해서 남보다 빠르지 못해서 바보 취급당하는 세상은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만 성과를 이루면 박수를 받고 존경을 받는다.
정직과 양심, 연민과 동정 같은 말들은 열등하고 쓸모없는 것들이 되어 죽어 버린 지 오래다.

만일 아직 숨이 붙어있다면 그것들이 품고 있는 내면의 의미는 이미 변질되어 본래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더 이상 모를 지경이 되었다.
아름답고 따뜻한 사람의 성향을 표현해 주던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저 예쁘고 보기 좋게 보이기 위해 사용되는 포장지처럼 잠시 잠깐 쓰이고 쓰레기통에 금세 처박혀 버린다.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하고자 해 왔던 수많은 노력들에도 인간의 본성은 세계 곳곳에 끊임없는 전쟁을 일으켜 왔고 지금도 그렇다.
엄청난 희생에도 아랑곳없이 여전히 전쟁은 인간의 욕망과 갈등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선호되며 점점 확대되고 재생산된다.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어 온 슬픈 사건들은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에게 더욱 잔인한 강화의 기회로 작용할 뿐이다. 애써 역사를 기록하고 남기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저 옛날이야기일 뿐인 것인지 모르겠다.

약육강식이 생존의 자연스러운 원리라면 난 약해서 잡아먹히는 가젤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그동안 많이 잡아먹히고 뜯어 먹혀서 그게 뭔지 잘 알기 때문에 이제는 나도 사자가 되고 싶다.
한 번쯤 우렁찬 포효를 하며 다른 동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사자로 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사자와는 사뭇 다르고 약간의 비슷함도 없으니 아무리 사자 노릇을 하려 해도 그렇게 봐줄 것 같지가 않다.
현생에선 글렀다.

가젤처럼 겁 많고 위험을 피하여 달아나는 도망자의 삶은 너무나 피곤하고 힘이 든다. 하지만 세상은 갈수록 살벌하고 위협적으로 변해서 점점 더 서로를 믿지 못하고 멀어져 간다. 각자의 벽을 쌓고 굴을 파서 그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새로운 구석기시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우리의 적은 공룡도 매머드도 아닌 인간, 바로 우리 자신이다.
모든 것을 정복하여 발아래 둔 인간에게 인간 말고 더 이상의 적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같은 종, 같은 편임을 인식하고 서로 도우며 살려면 외계인이라도 침공해 와야 되나 보다.
공동의 적이라도 생기면 정신이 들 것도 같기 때문이다.

거친 세상 속 가장 센 바람을 맞으며 견디는 모든 가젤들에게 내게 남은 연민과 사랑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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