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가버린 것들은

부서진 어린 시절

by 범고래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 가장자리로 살짝 기운 햇살이 길게 비추는 오후의 간선도로. 그 길을 따라 죽 늘어선 노랗거나 좀 더 노란 가로수의 화려한 치장에 마음이 저절로 설렌다. 이럴 때는 로맨틱한 여행이라도(이를테면 프랑스 파리 같은 곳) 떠나고 싶은 충동적인 생각이 든다.

시원한 듯 차가운 가을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달콤한 날들이 연속되고 있다. 몽실몽실한 기분으로 순간순간을 생생하게 즐기는, 깊은 가을색에 푹 빠져 지내는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하고 벌써 아쉬운 것은 금세 넘어가 버리는 석양만큼이나 짧은 가을이기 때문일 것이다.

황금빛 노을이 짙어지며 산그늘 아래로 그림자가 드리울 때 하늘을 가로질러 걸린 전깃줄에 엄청난 수의 새들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까만 깃털 사이사이로 하얀 깃털이 보이는 품이 까치 같기도 하고...

하지만 까치는 텃새인데 저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저렇게 단체로 모여 앉아 있는 건 보통 철새들이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기 위한 집합이 아니었나?

길가 이름 모를 새들의 어마어마한 의전 행렬은 어릴 적 이맘때면 연례행사처럼 치러지던 제비들의 겨울여행 사전 집결을 떠올리게 했다.

자고 일어난 어느 날 아침.
동네 골목을 따라 얼기설기 늘어진 전깃줄에는 남는 공간이 없을 정도로 제비들이 새카맣게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나의 눈에 그것은 마치 재앙의 전조처럼 무섭게 느껴졌고 어른들이 말해줘서 알게 된 후로는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마당에서 담벼락에서 내내 비비고 놀던 동네 그 어느 곳에서도 참새랑 같이 흔하게 보이던, 집에서 키우는 닭처럼 강아지처럼 익숙하고 정겨운 제비가 떠나는 날은 다가오는 겨울만큼이나 마음이 불편하고 덜거덕거렸다.

강남 가서 돌아올 땐 박 씨 하나 물어다 주렴.
흥부만큼 가난한 집에 제비가 가져다준 박 씨의 행운을 어린 마음에 품었었는데...

그리고 아주 오래전 일어난 제비한테 저지른 미안한 일.

어느 날 동네 단짝 친구 순이가 우리 집에 와서 대문을 두드렸다. 그날따라 빨리 자기 집에 가자고 보여줄 게 있다고 수선을 떨었다. 우리는 서둘러 손을 잡고 골목길을 뛰어 순이네 집으로 갔다.

순이네는 논과 밭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 동네에선 꽤나 부유한 축에 끼는 형편이어서 집도 기와집으로 널찍널찍한 처마를 매달고 있었다.
부모님은 농사일로 바쁘신지 집에는 순이와 아장아장 걷는 어린 동생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순이는 내 손을 놓고 마루로 올라가 어디선가 의자를 가져다 마루 가장자리에 놓았다. 그러고는 나더러 거기 올라가 처마 아래를 살펴보라고 말했다. 얼떨결에 올라간 의자에서 고개를 위로 들어 보니 어둑한 처마 밑에는 작은 새집이 납작하게 붙어 있었다.

진흙과 볏짚으로 만들어져 둥근 호주머니처럼 단단히 붙어있는 집. 순이는 그 속에 제비가 세 개의 알을 낳았다고 했다. 하지만 의자에 올랐어도 키도 작고 입구가 처마 밑에 바짝 붙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디 어디?' 하며 키를 돋우고 손으로 새집의 입구를 나도 모르게 조금 잡아당겼나 보다. 어이없게도 새집이 '툭'하고 떨어져 버렸다.

난 허망하게 떨어져 버린 새집과 그 안에 오손도손 모여 앉은 세 개의 제비알을 손에 들고 너무 놀라서 순이를 바라보았다. '어쩌지'하며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어가는 속으로 순이의 '으앙'하는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제비집을 들고 원래 있던 곳에 붙여보려 헛손질을 여러 번 해보다가 제비집을 마루 위에 살그머니 올려놓고 도망치 듯 순이네 집을 나왔다. 순이의 울음소리는 담너머 동네 골목골목으로 강물처럼 흘러나왔고 나도 그만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음은 나오지 않고 되돌릴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지른 내가 무척 원망스럽고 미웠다.

그날 밤 식구들은 다 잠들었지만 난 혼자 잠 못 이루며 그 제비와 제비알이 걱정되어 끙끙거렸다.
그날 이후 순이와 나는 사이가 멀어졌고 순이 소식은 그저 어른들 어깨너머로 얼핏 얼핏 전해 들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커갔고 다른 곳으로 학교를 갔고 결혼을 했고 영영 남이 되었다.

그렇게 집이 허물어진 상황에 제비알은 분명히 부화되지 못했을 것 같다. 한 제비 가정을 파괴하고 그로 인해 친구를 잃어버린 스스로 용서하지 못한 잘못이, 미안함이 내 기억 한구석에 오롯이 눈을 뜨고 있다.

그 많던 제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또 내 어린 시절은 어디로 가 버린 걸까.

한번 가버린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아름다운 가을도 그렇다.
가고 나면 다른 가을이 다른 얼굴로 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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