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들
한때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학교 동창은 아니었지만 우연한 인연으로 만나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된 사이였다. 우리는 같이 여행도 가고 고민도 나누며 오랜 기간 진정한 벗으로 지냈었다. 서로 더 많이 잘해주고 싶어서 안달 나는 그런 사이,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그런 우정이 우리 사이에 있었다.
친구와 나눈 순수하고 맑은 생각과 감정의 여운은 길게 이어져 헤어지고 돌아오는 내내 나를 미소 짓게 했다. 우리가 나눈 고민과 아픔들 그리고 그 위로 살포시 덮였던 위로와 따뜻한 마음들을 어디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혹은 서로를 바라보며 항상 한결같기를 바라고 그렇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 경험하는 모든 사소한 것들부터 중요하고 심각한 것들까지도 미세하게 또 때로는 강하게 우리를 흔들어 균열을 일으키고 조금씩 변화시킨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 변화는 날마다 빠짐없이 일어나지만 너무나 미미해서 우리는 자각하지 못하고, 그러는 사이
이리저리 부딪히며 다치고 상처 나는 위로 딱지가 앉고 흉터가 생긴다. 그 흉터는 다음번에 더 잘 방비하는 몸과 마음의 경험이 되어 우리는 잘 훈련된 전사처럼 삶의 파도와 격랑을 넘어간다.
삶에 박힌 굳은살은 한때 우리의 것이었을 천사의 날갯짓과 눈빛을 단단히 덮어버렸다. 그것들은 어린아이들과 천진난만한 반려동물의 마음 안에나 깃들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할 뿐이고 그마저도 언제 색과 향이 변할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상태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사람은 역경 속에서 삶의 진실을 다시 깨닫게 되지만 그 역경을 이겨내고 거센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지루한 시간과 거대한 세상 속 흐름에 금방 휩쓸려 다시 본래의 익숙한 모습으로 가라앉고 만다. 땅을 딛고 살아가는 존재가 언제까지 하늘의 별만 바라보며 거대한 괴리감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땅 위를 걸어 다니며 매일 사냥을 해서 작고 약한 생명을 취하고 피를 흘려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본능을 누르고 발톱을 감추며 살아가기에 너무 많은 노력과 가면이 필요한 우리는 어느 날 그냥 다 같이 벗어버리기로 작정을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가 서로에게 볼 수 있는 모습들은 참으로 황량하고 외롭고 잔인한 것들이 되었다.
기껏 관리하며 유지해 온 비세속적 이미지와 장신구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이타적인 언어들이 얼마나 쉽게 부스러지는 것들이었는지 깨닫고 나면 허무할 정도인 것이다. 이런 모래성을 쌓느라 헛고생을 했나 싶고 내 안에 내재된 생존을 위해 설계된 본능의 강력함에 놀라게 된다.
우리는 이런 존재다.
세상에서 뿌리내리고 살아남을 수 없는 아름다운 것들이 잠시 잠깐 머물다 사라져 버린 후에도 우리는 그 삭막함 속에서 꾸역꾸역 살아가야 한다.
봄날 공기 속에 떠돌던 엷은 꽃향기처럼 운 좋은 어느 겨울밤 별똥별처럼 있지만 없는 것들은 아쉽지만 잠깐이라도 보았으니 됐다고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마치 꿈속에서 나비를 본 듯 그 꿈을 잘 기억하고 그 시간을 음미할 뿐이다.
난 친구를 원망하지 않는다.
나도 변했을 것이고 관계의 유효기간이 다 되었을 것이고 삶의 트라우마가 지속되길 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냥 시간의 계곡을 따라 제 갈 길로 흘러갔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잠깐 동안 같이 갇혀 있었던 깜깜한 동굴 속에서 촛불을 켜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그 안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지켜본 시간이 있었음을 기억할 뿐이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는 말이 있다. 고난 속에서 닫힌 문을 대신해 그때 열렸던 다른 문이 보여준 우정과 희미했지만 분명히 그 자리에 머물던 진실한 것들을 그 친구도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