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비유하자면 봄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막 태어난 아기 때부터 스무 살 정도? 평균 수명을 얼추 팔십이라 하면 이십 년씩 끊어 봄여름 가을 겨울이라 하면 좀 억지스러울까. 물론 백세시대라고 우기게 되면 기준이 좀 달라지긴 하겠지.
날이 따뜻해지고 코끝에 스치는 바람도 부드럽고 향기로워지면 몸속을 흐르는 호르몬이 꿈틀거린다. 푸르고 싱싱한 계절 속에서는 대지의 넘치는 세로토닌에 싸여 마음이 간지러워진다.
몸속 혈관을 흐르는 피도 연한 초록색일 것만 같고 청춘의 여드름도 다시 얼굴 여기저기 그리고 등짝에도 용암처럼 솟아날 것 같다. 항상 이렇게 좋은 기분으로만 살면 좋겠다. 그건 너무 조증인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좋은 기분을 주기 때문에 그것들을 원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동안 모든 관계와 일속에서 이루진 성취와 성공들 역시 어떤 모양이든 그것은 우리에게 깊은 만족감으로 다가오고 사라진다.
달콤하고 향긋한 꿀을 찾아 헤매는 꿀벌처럼 우리는 평생의 삶을 그렇게 좋은 기분을 위한 재료를 채집하는데 다 바치고 모은 채집물을 서로 견주고 절망한다. 은은하고 잔잔한 것부터 강렬하고 자극적인 것까지 우리의 기분은 프리즘을 통과하는 빛의 스펙트럼만큼이나 색이 다양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봄에는 지구 위 모든 생명체가 들뜨고 어쩔 줄을 몰라한다. 기분 최고다.
말 안 듣고 제멋대로인 자식처럼 우리의 기분은 때로는 날뛰고 때로는 바닥에 널브러져 이불을 뒤집어쓴다. 좀처럼 통제하기 힘든 널뛰는 기분만 아니면, 수시로 넘나드는 천국과 지옥의 감정을 통제할 수만 있다면 그럭저럭 삶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감정과 기분에 따라 많은 것들을 결정하고 세상 모든 문제의 원인도 감정이나 기분인 경우가 많다.
감정을 제거하는 약을 의무적으로 복용시키고 감정을 느끼게 하는 모든 예술을 금지해서 극도로 냉정하고 통제적인 사회를 만들었던 SF 영화가 생각난다. 물론 금지하는 것에 끌리는 인간의 속성상 누군가는 비밀리에 음악을 듣거나 약을 거르고 감정을 느끼는 범죄를 저질러 처형을 당한다.
감정을 제거하면 어떤 기분일까. 아니 그 기분조차도 없는 걸까. 세상의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감정과 기분을 달달하게 조절할 수 있다면 그는 절대반지를 가진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력이 넘치는 봄에 반해 기분이 처지기 쉬운 겨울을 나타내는 색은 어떤 것일까
하얗고 푸르고 잿빛이고 검고 우중충하다. 추위에 퍼렇게 드러난 손등의 혈관이 그렇고 잎사귀를 다 떨구고 앙상하게 서있는 나무가 그렇고 힘없이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해 없는 저녁 하늘이 그렇다. 하루는 더디게 시작되고 무기력하게 버티다 금세 쓰러져 잠이 든다.
기운 없이 흐린 하늘은 바라보고 있으면 인디고블루 같은 우울을 전염시킨다. 재난이라도 만난 듯 일시에 다 숨어버린 생명체들과 앙상하게 뼈만 남아 어슬렁거리는 늑대의 잿빛 눈이 슬픈 계절, 겨울이다.
겨우내 꽁꽁 얼려뒀던 우울을 꺼내 따스한 봄볕 아래 널어놓으니 송골송골 땀을 흘리다 이내 녹아 땅에 스며들어 버렸다.
봄볕 아래 버틸 수 있는 괴로운 감정은 없다. 탈탈 털어서 널어놓으면 바싹 마르고 풀 향기가 배어든다. 그러면 슬며시 마음이 놓이고 겨울 동안 바짝 곤두서 있던 등 위의 가시도 순하게 드러누워 행복한 고슴도치가 된다.
창문을 열면 달콤한 숲의 향기가 연초록으로 흘러들고 그 너머 풀 바닥에는 앙증맞은 곤줄박이, 박새가 바닥을 콩콩 뛰어다니며 씨앗을 주워 먹는다.
숲 사이로 비껴드는 한낮의 노란 햇살이 땅을 덥히면 아롱아롱 아지랑이가 솟아오르고 노곤한 참새들이 대추나무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슬그머니 하품이 나고 내 얼굴을 주시하던 강아지도 입을 쩍 벌리며 따라서 하품을 한다.
얼었던 땅도 거기에 뿌리내린 나무도 나무 위의 새들도 그들을 바라보던 나도 나를 바라보던 강아지도 모두 다 졸리운, 봄은 낮잠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