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질(vigil) 전날 밤
감자를 삶고 있다. 싹이 나고 파란 부분이 많아서 칼로 많이 도려냈는데, 내가 먹을 감자가 아니라서 감자가 너무 못난 모습인 게 감자를 깎는 내내 신경이 쓰이고 미안했다. 내일 아침에는 비질(vigil)에 참가하러 오산에 간다. 나에게는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내가 가서 본다고 해서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사실 그보다도 내 마음이 다칠까 봐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지난 11월에는 살처분 반대 액션에 퍼포머로 참여했다. 나는 방역복을 입고 살처분당하는 동물을 억지로 끌고 가서 죽이는, 공권력을 상징하는 인간 역할을 했다. 액션 리허설이 있던 날 저녁에 예전 구제역 때 너무 많은 양의 돼지를 살처분해야 해서, 포클레인 기사인 우리 삼촌도 거기에 동원되어 일했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처음 전해 들었다. 삼촌이 그 일을 하고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했다. 가해자라고만 생각한 이도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12월에는 비건 글방 친구들과 전시를 했다. 나는 마주 보는 개와 인간의 모습, 그리고 자고 있는 아기 멧돼지를 흙으로 만들었다. 누워 있는 멧돼지나 돼지 이미지를 찾고 싶었는데, 이미지 검색을 하면 자꾸만 착취당하는 모돈의 모습이 떴다. 멧돼지는 구제역과 농가에게 피해를 주는 동물이었고, 내가 바라는 이미지는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총으로 살해 당해 길에 죽어있는 멧돼지의 모습을 보고, 그리고 나에게 익숙한 우리 집 개의 자는 모습을 생각하며 잠자는 아기 멧돼지의 모습을 만들었다.
돼지가 살처분당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잠자는 돼지의 모습을 만드는 동안 나는 돼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동안 수많은 돼지의 살을 먹었고, 음식점에 붙어있는 들판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돼지의 사진을 봤을 뿐, 단 한 번도 죽지 않은 온전한 몸으로 살아있는 돼지를 본 적이 없다.
살처분 반대 모임에서 만난 생강님의 전시를 보러 갔었다. 생강님은 생츄어리 활동을 하시는데, 활동을 하시면서 돼지 새벽이와 잔디의 사진을 찍으셨다. 사진 중 유독 누워서 쉬는 모습의 사진이 많았는데, 죽은 돼지가 아니라 살아서 잠을 자고 있는 돼지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편안하게 쉬고 있는 그 모습이 슬프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내일은 곧 죽을 살아 있는 돼지를 만나러 간다. 돼지는 6개월이 되면 도살을 당하는데, 인간의 나이로는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는 나이라고 한다. 호기심이 많을 나이라 겁이 나면서도 사람들이 궁금해 다가온다고. 이미 무게당 값이 다 치러진 돼지들이라, 트럭이 더러워지고 사료가 아까워 하루 전날부터 음식도 물도 주지 않는다 들었다. 그 돼지들에게 주고 싶어서 감자를 삶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