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태어난 사람
무언가를 기르는 데는 영 소질이 없다고 생각한다.
살아있는 것 중에서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을 전부 통틀어 지속적인 애정을 갖고 무언가를 길러 본 적이 없었다. 가장 오래 기른 것은 초등학교 시절에 집에서 기른, 동전 크기의 등딱지를 가진 거북이었는데 껍질이 계속 탈피하여 손바닥만해질 때까지 오래 길렀다. 수년은 밥을 주고 물을 갈아주었을 것이다. 예뻐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름도 붙여주었고 손 위에 올려놓고 햇볕을 쬐어 준 기억도 있다. 거북이들은 덩치가 커지자 어항을 자주 넘었다. 한 마리가 도망나가 오래도록 찾지 못하다 장롱 사이에 죽은 채로 끼어있는 것을 찾았다. 남은 한 마리는 다니던 학교 앞 냇가에 풀어주었다. 그렇게 오래 기른 거북이를 갖다 풀어주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그냥 예전에 그랬었지-하는 기억만 남아있다.
시험 준비를 하면서 독서실에 다육 식물을 들였던 적도 있었다. 오랜 수험 생활로 지쳐있었고 마지막 시험 준비라고 다짐했다. 화분이 죽으면 시험에서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시험은 11월이었고 다육이는 한달 전부터 서서히 시들었다. 시험을 다 치를 때까지 살아있긴 했는데 얼마 못 가 결국 죽었다.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독서실 구석에서 몇 달을 있었으니 녀석으로서는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험이 끝날 때까지 버텨줘서 고맙구나' 라는 생각보단, 말라 비틀어진 잔해를 치워야겠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 이외의 생명체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몇 년씩 돌보아 본 경험이 없다. 나조차도 잘 돌보지 않고 살았다. 먹을 것도 내키는 대로 먹는다. 속이 더부룩한 것이 역류성 식도염의 증상인 것을 알면서도 식후 커피를 끊지 못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성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계속 고민하는 것은, 이제 건강한 아이를 낳기에 어려운 나이임을 알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놀이공원으로 따지면 폐점 시간은 열한 시인데 열시 삼십분이 된 기분이다. 또는 유통기한이 직전인 우유를 살까 말까 마트에서 고민했던 순간의 기분, 대학교 원서를 접수하기 직전의 기분과도 비슷한 것 같다.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지만 확신은 없는 기분, 내 결정을 미래의 내가 후회할 것 같은 기분, 몇십년 후의 내가 지금의 나를 깊이 원망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쩌면 슬픔에 가까운, 후련하기도 하면서 막연한 두려움이 함께하는 이 기분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자연적인 가능성을 단호하게 차단하는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내 뱃속에는 정해진 목적을 가진 일정 분량의 세포가 있다. 매달 자라고, 자리를 잡고, 필요가 없어져 사라진다. 뚜렷한 목적을 가진 세포가 이유 없이 떠나가는 과정에서 씁쓸함을 느끼지만, 그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차원에 있는 일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대신 나는 나를 기른다고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불완전하고 미완성적인 존재인 나를 애정을 듬뿍 쏟아서 돌보기로, 차근차근히 모르는 것을 알려주며 기르기로 마음 먹었다. 슬픈 날에는 내가 내 눈물을 닦아 주고, 기쁜 날에는 내가 나에게 케이크를 사 주면 될 일이다. 그러다 보면 나이가 들어서 뭐라도 되어 있겠지,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어 있겠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