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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

검은 베일의 목사에서 웨이크필드까지

by 아라베스크


바벨의 도서관 7권 너새니얼 호손 편엔 흥미로운 순차가 있다. 바벨의 도서관 전집 작품들 순차가 독자에게 작품을 작품 자체보다 더 풍부한 경험을 안겨주려는 편집자 의도가 느껴지기에, 나는 각 권마다 내가 생각하는 특별한 순차들을 즐기는데 그중 너새니얼 호손의 검은 베일의 목사에서 웨이크필드로 맺어지는 순차를 특히 좋아한다. 유비와 대비로 우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후퍼 목사와 웨이크필드 둘 다 화자조차 알 수 없는 계기로 일상을 거부하고 자기 정신세계로 침잠한다. 검은 베일의 목사에선 얼굴 전체를 가리는 검은 베일이 목사와 일상 세계를 단절시키는 상징물로 등장하고 웨이크필드에선 집이 한 인간 세계의 제유로 활용된다. 검은 베일의 목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검은 베일을 쓴 순간부터, 웨이크필드에선 웨이크필드가 런던에서 돌아와 아내와 함께 살았던 집 현관을 무의식적으로 오르려다 거부한 순간부터 우리의 주인공들은 자기 세계에 갇혀 버린다.


다만 목사에게 이런 단절은 성찰과 경외를 불러일으키기 효과적이기에 그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베일을 벗지 않으려 한다. 독자는 이런 검은 베일의 목사에게서는 자기 삶의 행동 양식을 바꿀 우화를 느끼지 못한다. 후퍼 목사는 어디까지나 성직자로서 특별한 위치에 있기에 비범한 규칙과 행위가 신앙의 신비로움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반면 웨이크필드는 그 기이한 행적 말고는 대부분 독자와 같은 층위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마지막 선택으로 앞서 검은 베일로 마주했던 우화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십 년 동안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집에서 홀로 살아가며 자기 아내가 과부로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에 어떤 공감을 할 수 있는지 사람들은 의구할 것이다. 웨이크필드의 행위는 인간 사회 규범과 체제가 비동의로 구축된 세계란 걸 깨닫게 한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일반 생활 속 규칙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했던 인간이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일상을 뒤바꿀 수 있다는 점은 사회 토대가 환영일 수 있음을 암시하지만 반대로 결혼과 사랑이란 인간적 가치에 본질적 현실감을 빚으려면 비동의로 받아들였던 세계를 거부한 뒤 생각하고 판단하여 다시 동의하는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첫 번째 사회 예속은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선택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후퍼 목사도 젊은 시절 엘리자베스와 약혼을 파기하고 평생을 신앙 속에서 살다 그녀의 간호를 받으며 임종에 든다. 웨이크필드는 자연의 신비로운 변화로 이십 년을 걸쳐 오르지 못한 현관 계단을 오를 수 있는 기적을 맞는다. 사랑이란 보편적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이 강력한 우화 전달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다. 보르헤스는 인간 정신이 만지고 볼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 본질적인 현실이라 말했다. 너새니얼 호손은 아버지 호손 선장이 죽은 이후로 더는 가족과 함께 식사할 수 없었다. 그들 가족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서로 함께 모여 식사하지 않고 말도 섞지 않으며 각자의 방에서 은밀하게 살아갔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들 가족은 비동의로 받아들인 세계를 비동의로 거부한 셈도 되지만 호손은 12년 동안 자기 방에서 글자 위에 자기 정신세계를 구축했고 파괴된 자기 현실을 우화로 새롭게 창조해 본질적 현실을 정의했다. 비록 본인은 파괴된 현실 속에서 실패와 병, 정신 착란을 겪으며 살아갔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릴 적 동화로 잘못을 배워간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눈에 담아 가며 나이를 먹지만 정작 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없어, 자신 또한 하나의 우화가 된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 채 죽는다. 나 또한 검은 베일을 쓰지 않았다고 볼 수 없고, 나만의 집을 어딘가 마련한 채 여기 일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계속해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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