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소설 속 하얼빈의 안중근
영화에서 안중근은 홀로 안중근이란 운명 속에 던져진 것을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한이란 이름을 국가의 칭호로 쓴 이래로 안중근이란 이름은 고통과 헌신, 숙명과 영웅의 운명을 지칭하는 대명사이자 훌륭함의 상징이면서 고독과 비극을 이면에 둔 한 인간의 이해하기 어려운 열망이었다. 우리의 현대 그리고 미래도 안중근이란 이름과 독립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듯, 안중근도 자신의 생명이 독립이란 이상에 담겨있다 생각했다. 소설에서 안중근은 죽음이란 결말을 내적 동요가 없는 확고한 의지로 받아들이지만 영화에서 안중근은 홀로, 얼어붙은 강 위에서 동료들에게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죽음을 예감하며 두려워하는 것으로 그를 기억하려고 한다.
안중근의 자서전을 전부라 여기고 그를 떠올린다면 소설 속 정해진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 우멍한 인간의 모습이 안중근의 실제 면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안중근은 자신에게 주어진 몇 가지 우연을 다행이라 여기며 생업을 달성한 것에 안도한다. 그의 식솔들이 하루 늦게 하얼빈에 도착한 것, 이토를 환영하는 주악 소리,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을 때 우덕순이 먼저 와 있던 것을. 소설은 안중근이 우덕순에게 가게 된 것을 그렇게 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기록한다. 왜 우덕순의 하숙방으로 발길이 향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면서. 작가가 후기에 밝혔듯 작가도 자신에게 예감되는 죽음을 느끼며 집필하였기에 안중근도 자기 죽음을 확신하듯 권총을 점검한다. 소설 속에서는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안중근의 내적 동요를 묘사한다.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고. 총을 쥔 자는 살아 있는 인간이기에 총구는 늘 흔들렸다며.
영화에서 가상 인물 이창섭이 죽기 직전 안중근은 고결하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이 후대의 인식이라고 여긴다. 소설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죽고 안중근이 체포된 소식을 볼모로 잡힌 황태자 이은이 접했을 때의 반응은 범인이 조선인이라 얼굴이 하얘진 것과 스승 이토가 죽어 깊이 상심하고 슬퍼하는 것이었다. 조선 팔도는 고요했고 순종은 그 고요의 바닥이 두려웠다고 소설은 적는데, 실제 지배당하고 있는 조선에선 뜻있는 자가 아니고선 안중근을 미치광이 취급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안중근은 뮈텔 주교의 판단으로 천주교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죄인으로 1993년까지 남아 있었다. 당대에 안중근은 가족과 친구, 독실했던 종교에서도 살인자였고 당시 국민들에겐 나라를 더욱 어지럽힌 국범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관리들에게 수탈당하고 일제에 짓밟힌 조선이란 나라에서. 그가 감옥에서 옥리들에게 청탁받아 쓴 글씨 중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부조知松柏之不凋는 그가 무엇을 믿을 수밖에 없는지 예감하게 한다. 날이 추워진 후에야 잣나무와 소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라는 논어 구절 속에서 자기 운명을 봤을 것이라고.
당대, 1909년 조선이란 나라에서 안중근이 생각했던 단 하나. 독립이란 두 글자로 부를 수 있는 운명을 나는 조금 풀어서 말하고 싶다. 안중근은 그날이 오리라고 믿었다. 그날이 오리라고 알았더라면 안중근은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믿었기에 안중근은 잣나무와 소나무를 떠올리며 동이 트는 아침 하얼빈에서 이토를 기다렸다. 나는 그런 안중근의 모습을 하나의 면모로 말하기엔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로지 그가 하얼빈에서 이토를 기다리는 모습에서 너무나 숭고하며 감당하기 어려운 비애를 느낄 뿐이다. 적중률이 떨어지는 총구, 확신할 수 없는 저격 지점, 실제로 처음 보는 표적과 자기 행위의 결과로 예측할 수 없는 나라의 미래가 죽음을 앞둔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거워 달리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믿음.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의 무게를 나약한 육체로 견딜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믿음 때문이었다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오늘이며, 그날의 오리라는 믿음의 결실. 나는 오늘, 그날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를 기억한다. 그리고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