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누가미 일족을 보고 나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영화의 끝에 이르러 사건 진상이 밝혀지는 곳이었다. 경찰서장이 살인자에게 묻는다. “그런데 살인 후에 사체들을 처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나요?” 살인자는 네 번에 네 명을 죽였지만 네 번 다 사체를 유기하거나 사건 자체를 은폐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건은 현장과 사실 관계가 기이하게 조형돼 진짜 살인자는 은폐되고 용의자는 늘어나며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간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탐정 킨다이치 코스케 - 김전일의 할아버지 - 시리즈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 이누가미 일족은 범인과 추리보다 관객이 마주하는 장면들의 설명이 가장 중요한 추리극으로 이누가미, 개 귀신 혹은 개 요괴가 씐 것처럼 일그러진 한 가족의 이야기다. 강물에 거꾸로 처박힌 시체를 주변의 고요하고 푸르스름한 풍광과 대비시킨 그로데스크를 대표 이미지로 삼는다. 이누가미는 개 귀신, 혹은 개 요괴로 인간에게 씌워져 여러 가지 해코지를 하고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악귀로 알려져 있다. 굶주린 개를 땅에 목만 내놓게 하고 묻어 바로 앞에 음식을 두곤 죽을 때까지 괴롭히다 죽기 직전 목을 베어 저주의 도구로 만든다고 전해진다. 이누가미는 계승도 가능해 통상 모계로 이어진다고. 영화 이누가미 일족은 원작에서 일부를 삭제하고 몇 가지를 변형해 말로 설명되지 않은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구축한다. 개봉 당시 엄청난 인기로 현재까지도 일본인들에겐 소설보다 1976년 영화로 기억에 남아있으며 그 후 수많은 일본 작품에선 앞서 언급한 대표 이미지의 오마주부터 시작해 괴이한 일족 - 일본 화족을 모델로 삼는 - 이미지와 비틀어진 정서 등을 일부 차용하거나 아예 그대로 인용하여 작품을 창작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최근에 볼 수 있는 작품들로는 간니발이라던가, 극장판 미스터리라 하지 말지어다, 키타로의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가 이누가미 일족의 배경과 대립 구도를 탁월하게 차용하거나 그대로 인용하여 작품을 완성시킨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본 이 원형의 탁월함은 가장 흥미를 느꼈던 부분에 기초한다. 첫 살인 후에 이어진 두 번째 살인. 세 번째, 네 번째에 이르러서도 살인자는 사체를 유기하려는 노력은커녕 사건 자체를 은폐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다만 사건 현장이 변형되어 진범을 쉽게 추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용의자로 몰리는 사람을 옹호하고 사건을 통념으로 일반화해 혼란을 일으킬 뿐이다. 여기서 관객 또한 혼란에 빠지는데 작품에 내재 된 모성과 부성, 개처럼 얽히고설키는 가족 계보가 사건의 발단인 유언장과 결부되어 각각의 사건들이 현실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건 영화 제작의 의도로 영화는 원작 소설의 설명이 필요한 부분을 삭제하고 일부를 변형시켜 사건의 신비로움을 부각시켰기에 그렇다. 한 예로 소설 속에선 강물에 거꾸로 처박힌 사체가 마지막 가보와 함께 애너그램으로 활용되지만 영화에선 파악할 수 없는 살인자의 힘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한다. 이렇게 연출되는 심상들을 적층한 채 듣는 경찰서장의 질문 뒤로 관객은 뒤틀리고 비틀어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생각한다. 영화 속 인물들. 특히나 진범의 경우도 비단 살인만이 아니라 살아온 인생의 여러 면에서 상식을 벗어나 잘못되고 부조리한 행위를 하여 살아왔다. 그는 권력자이기에 모든 행위에 이유와 실리가 있지만 제도를 벗어나 제도권 자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계층이기에 행위 선택에 있어 이유와 실리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점, 도덕을 배제한다. 그래서 행위 자체를 하지 않는다란 선택은 그에겐 없다. 제어와 자제는 나약함의 증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상황 자체를 통제할 수 없을 때 드러내는 허술함을 경찰서장과 관객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제도권 밖에 있기에 제도권 내의 관습이나 상식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일련 사건들이 진행되는 동안 자기가 의도하지 않는 사실들로 현장이 변형되었음에도 누군가에게 들켰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오히려 그런 조건들이 자신을 은폐해 주고 사건을 조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에 또 다른 범죄를 일으키는 계기로 활용할 뿐이다. 범죄가 드러나 진범으로 몰릴 때까지 더욱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더욱더 폭주한다. 이게 이누가미에 씐 것처럼 보이는 권력자의 모습이다.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나스 시는 이누가미 일족의 제약 사업으로 유지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이것은 하나의 제유로 일부에게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대다수 일반 사람들의 삶은 우리 현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였을까, 범죄를 시인하고 반성보단 사랑을 표현하며, 죗값을 치를 바에 차라리 자살을 선택하는 진범에게서 더욱 무력함을 느꼈음을. 그들은 제도 안에 귀속되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차라리 죽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것을 바라보며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내가 갖는 무력이란 힘의 원천이다. 그들이 우릴 살아가게 한다면 그들은 우릴 무력하게 한다는 도식을 나는 이 세상 속, 하나의 진리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