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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지 않는 곳에서 진실을 전하는 귀여움

미키 17

by 아라베스크


원작 설정, 익스펜더블과 프린팅, 그리고 멀티플은 공각기동대가 A.I 시대를 맞이한 우리의 현재를 관통하고 있는 지금에선 불필요한 논의로 영화에서 미키의 기억을 보존하는 하드 디스크처럼 투박하고 고루하며 시대착오적 개념처럼 느껴진다. 실제 영화에서 이 설정 부분을 설명하며 논의하고 전개하는 초반 과정은 노동의 형태, 가치, 관념이 변화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대에게 웃음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여하한 검토 과정 없이 숙고도 없이 익스펜더블이란 직업을 선택한 건 미키의 잘못이고 삶을 안이하게 생각하는 세대 의식의 문제이기에 현실에서도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풍자 웃음보단 거울 치료정도로 보인다. 죽는 순간 죽기 전까지의 기억이 어떻게 보존되고 연결되는지 설명하지 않는 점은 넷을 떠도는 집약적 데이터가 전뇌화한 육체를 빌어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는 공각기동대의 고스트에 비해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진 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고, 계층과 계급의 차로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도인 건지 영화를 끝날 때까지 관객은 알 수가 없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로 영화 제목이 미키 17이든 미키 18이든 미키 7이든, 미키 번스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계급보단 계급의식이고, 공포보단 귀여움이며 진실보단 거짓이고, 감독의 여러 작품들에서 몇 영화가 그랬듯 컨텍스트적 관점에서 이번 영화엔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마지막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점은 내게 봉준호 감독 영화를 바라보는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되는 부분이며 실제 비가 내렸던 영화와 비가 내리지 않았던 영화가 평가면에서 극명하게 갈리는 특징이 된 핵심적 요소다. 그래서 이번 영화 미키 17에서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평가는 비가 내렸던 전작들에 비해 낮을 수밖에 없었지만 놀랍게도 비가 내리지 않았던 영화들 중에선 최고였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크리퍼는 감독의 화신처럼 보인다. 이 크리퍼가 대화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고 감독의 일화를 찾아본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할 것이다. 그리고 이 크리퍼의 갈등 해결 국면은 영화에서 엄청난 장관으로, 영화 처음에서 여기까지 이어지는 감성을 폭발시키는 훌륭한 전개를 이루어낸다. 장면 구성, 전개와 편집 방식, 사운드의 완벽한 조화가 관객을 엔딩까지 이끈다. 그래서 나는 원작 설정이 결국 이런 결말을 위해서일 뿐, 전작 기생충 분석으로 사람들을 길들인 함의라는 요소를 부정한다. 다만 장르가 SF이기에 사색적 부분을 생각한다면 멀티플이란 설정이 아니라 미키 18과 케네스 마샬의 대립과 그 결과가 관객에게 묘한 감정을 준다는 것에 방점을 찍고 싶다.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라 허를 찔린 것도 있지만 그 둘의 대립은 묘한 은유가, 관념이, 사색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의미를 찾고 함의를 발견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일파 마샬이란 존재의 모든 것이다. 거기서 많은 것을 파밍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일파 먀살은 미키에게 하나의 악몽일 뿐, 영화에서도 결국 Fuck Off란 대사로 사라질 환영에 지나지 않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난 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홍보 문구가 - 노동을 강조하는 - 영화를 보는 주된 시선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미키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은 만큼이나 미키의 노동은 하찮고 불분명한 개념일 뿐이다. 대부분 실험체로 죽는 것이 노동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노동이란 게 당하는 걸 견디는 개념이 아니지 않은가? 당하고 견디는 관념으로서 노동을 말하고 싶었다면 실험체란 비유로는 적절하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홍보 문구는 그야말로 겉핥기식 치장일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놀랍게도 감독이 만든 영화가 무엇인지 관계자들조차도 제대로 이해를 못 한 게 아닐까란 추측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독이 이 작품을 선택한 의도가 크리퍼 때문이 아닌가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이 작품의 매력이 크리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귀여움이 나우시카의 오무랑 구별되는 점이다. 조코에게 귀여움이 없었다면 마더의 협박은 다른 감성을 주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앞서 언급했던 갈등 해결 국면은 괴수 영화의 결말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내가 영화를 보며 떠올렸던 지브리 작품은 이웃집 토토로였다. 그리고 미키 17의 성취는 토토로에게 비견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음이다. 약간 비약이 있는 평가이긴 하지만 나는 그것 때문에 이 영화에 비가 내리지 않아도 좋았다. 눈이어서 더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미키 17은 크리스마스, 홀리데이 시즌에 개봉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예상해 본다. 영화 수익을 기반으로 영화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조금은 줄어들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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