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The Ides of March와 킹 메이커
한때 내 영화평 저변에는 번안된 제목을 불신하는 마음이 꿈틀거렸었다. 영화를 보지 않은 것 같은, 아예 영화 의미까지 뒤바꾸는 작명 감각은 대체 관계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일을 하고 논의하고 살아가고 있는가까지 생각해 보게 했다. 인간 논리의 한계라고 하기에 헛웃음만 나오는 제목까지 보게 되면 한편으론 초월을 의도하는 엄청난 해석이 아닐까란 곡해까지 하게 된다. 그렇다. 그들은 철저히 돈을 목적한다. 영화 산업. 이 산업이란 말에는 멍청함이란 숨은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돈은 판단을 어긋나게 하고 작명 머리가 감상의 마음을 기만하게 한다. 이럴 바엔 차라리 원어 그대로 제목을 표기하는 게 나을 것이다.
제목이 왜 중요한 것일까? 대한민국 서울 사람인 내가 분개하는 것은 이 제목의 중요성, 제목이란 어쩔 수 없이 작품 해석 노릇과 관점 고착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 사람 움베르트 에코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불행히도 이 제목이라는 것이 작품 해석의 열쇠 노릇을 한다. 우리는 ‘적과 흑’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이 환기시키는 관념에서 빠져나가질 못한다. 독자를 가장 존중한다고 볼 수 있는 경우는 역시 소설 제목을 주인공 이름에서 따오는 것으로 ‘데이비드 커퍼필드‘ 혹은 ‘로빈슨 크루소‘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이렇게 소설 제목에 등장인물을 언급하는 일조차 저자의 부당한 간섭이 되는 경우가 있다. 가령 ’고리오 영감’ 경우 독자들은 자연히 ‘고리오 영감‘ 에게 맞추어진다. 그러나 이 소설은 라스타냑 이야기, 보트랭 이야기 혹은 콜랭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마도 최선의 방법은 뒤마가 했던 것처럼 아예 까놓고 정직하지 못한 방법을 쓰는 길일 듯하다. 뒤마는, 제목은 ’ 삼총사’라고 붙여 놓고 실제로는 ‘제4의 총사銃士‘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호사는 누리기가 쉽지 않다. 말하자면 저자가 실수를 통해서가 아니면 누리기가 어려운 호사인 것이다. “
킹 메이커. 이건 영화를 욕심으로 봤다는 방증이다. 정치판에서 비판의 어휘로 자주 언급되는 포퓰리즘이 여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말했던, 사람들이 모호하게 같은 말을 사용해서 다른 뜻을 나타내는 경우다. 우리 현실에서 동네 사람보다 익숙한 정치가들이 말한다. 네. 아니오. 그들에게 네는 아니오고, 아니오도 아니오고, 아니오의 아니오도 아니오로 말한다. 이런 탁월한 언변을 구사하는 사람들로 우린 너무나 자주, 칸트보다 어려운 철학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칸트 번역서는 이들의 말에 비하면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들의 말, 네는 네의 아니오, 네의 아니오는 때론 아니오이기 때문에. 일반 시민은 절대 그들의 말을, 본심을, 절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영화 원제 The Ides of March는 작품의 시점을 자명하게 설명한다. 그래서 킹메이커란 번안 제목이 왜곡으로 대비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의 핵심은 바로 이 왜곡이다. 킹 메이커란 제목은 관객이 스티븐의 장악력에 주목하게 하기 때문이다. 제목이 인칭 명사이기에. 그래서 스티븐이 추대하는 대통령이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생각하게 할 것이다. 이게 킹 메이커의 의미자 의도다. 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 사람이 앞서 언급한 내용처럼 이 작품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임을 생각할 수 없게 할 것이고 관객을 스티븐의 입장에 서게 할 것이다. 원제가 의도하는 ‘때‘ 에 대해 생각할 수 없게 할 것이다. 이렇듯 어떤 현상을 진실에서 비껴 하위 개념 안에 사람을 가둬두는 프레임은 우민 정책에서 자주 드러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세도가의 본질을 꿰뚫는 이 작품에서 이런 작명으로 이런 왜곡이 발생했다. 이게 내가 분노하는 이유다. 영어를 모르는 사람, 컨텍스트로 The Ides of March를 모르는 사람, 정치가와 정치를 권력 싸움으로만 인식하는 사람들을 농락하는 작명이 바로 킹 메이커다. 우리의 눈을 가리고 그들 중 누군가를 반드시 선택하라는 그들의 요구. 그들이 소리쳐 외치는 우리라는 말과 국민이란 말에는 내가 없음을 느끼는 무력감. 눈을 가리고 진실을 들을 수 없게 소음을 내며 당신이 느끼고 알고 있는 게 틀렸다고 지적하는 기만의 언사처럼 이 제목은 카프카의 K가 본질에 다다를 수 없는 운명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관에서 보고, 스트리밍 서비스로도 보면서 제목이 표기되는 장면에서는 똑같이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영화 속 스티븐이 모리스에게 하는 말 to young, too bad가 킹 메이커란 제목으로 영화를 보는 이에게 하는 말처럼 보일 정도니. (어린아이들에겐 투표권이 없다는 것과 그래서 안됐다는 걸 유머러스하게 전달하지만 이 논리는 어린 계층은 국민이지만 권리가 없기에 중요하지 않다는 말로 환원된다. 그러나 투표권이 없는 이 어린 계층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들의 논리가 작품 결말에 매우 중요한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원제 The Ides of March는 3월 15일을 지칭하는 것으로 줄리어스 시저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는 날이자 그 맥락으로 권력이 배신으로 몰락하는 날을 가리킨다. 그래서 영화 원제는 이 ‘때’라는 것을 주목하게 하는 것으로 왜 이런 날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가를 명시하는 것이다. 세계 각국 다양한 인종의 역사에서 왜 이런 날이 도래할 수밖에 없는가, 생명의 운명처럼 인간 사회에 The Ides of March가 반드시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가를. 모리스가 차 안에서 부인에게 하는 말 “매번 선을 긋는데도 자꾸… 선을 넘게 돼.” 도덕이 추락하며 타협이란 물감으로 지성을 전횡으로 덧칠할 수밖에 없음을. 반복하여 영화를 보게 되면 모든 건 데자뷔이고 항상 그래왔었다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라 이해하게 된다. 항상 모든 선거에는 인턴이 있고, 그게 여자일 수 있으며, 그녀는 커피를 배달하며 때로는 고결한 덕성을 지닌 후보자에게 커피를 들고 다가갈 수 있으며, 때때로 그때가 자정이며, 둘 다 술을 마셨을 수도 있고, 결혼한 고결한 덕성은 젊고 젊은 예쁜 여자에게, 그녀가 20살이라며 속이고 들어온 십 대란 걸 모르고 끌릴 수도 있으니까. 단둘이 있던 그 방의 방문은 아주 가끔 투박하고 깨끗한 남자의 손으로 닫힐 수가 있는 것이다. 정치가의 스캔들은 크게 두 가지. 돈 아니면 섹스. 이런 의미에서 킹 메이커란 제목은 우리가 모리스의 도덕적 타락을 직시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을, 폴의 도덕적 신념이 결국 몰락의 단초가 된다는 것을 직시할 수 없게 한다. 더욱이 시저가 브루투스에게 살해당할 수밖에 없는 정치 본질을 생각할 수 없게 하며, 영화 속 모든 일들이 하나의 메이킹 과정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로 흥미만 돋우는 자극적 요소로만 보이게 할 뿐이다.
최근 최고 권력의 몰락을 지켜보며 생각한 것이 있다. 무엇을 목적하는 것인가란 점이다. 목적이 사랑이었다면. 권력의 지속이라던가, 대의를 두른 명예는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였다는 걸까?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현실은 행위로 망가졌다. 만약 목적이 사랑이었다면 이 결과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사랑만이 아니라면 나는 위치가 사랑만큼 중요한 것이었다고 본다. 추상적인 인간 사회 개념으로 위치는 타인을 근거 없이 무시할 수 있다는 현실적 능력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위치는 대면 시 상대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는 방패이며 오히려 상대를 무시할 수 있는 무기다. 그게 그의 생존 방식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길 무시할 수 있는 상대에게는 - 자신이 인정하는 존재에게는 - 하염없이 약할 뿐이다. 다만 이 약한 모습 보이는 건 그에게 사랑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몰락은 일반적 몰락과 형태가 달라 보인다. 그는 헌법 재판소에 증인으로 출두한 사람들에게 배신을 느꼈을까? 나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그들이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그에게 The Ides of March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생각하지 못하는 곳, 사람에게서 진정한 몰락은 찾아올 것이다. 물론 내 예상과 다르게 그들의 사랑이 견고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사랑은 인류에게 진정 위대한 것으로 다시 한 번 증명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모든 걸 초월하는 것으로, 그 어떤 가치보다 위에 있는 것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