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계시록 안에서
대한민국 사회에서 종교인, 그중 목사에겐 지울 수 없는 선입견이 존재한다. 비리와 추문으로. 그들은 하나님에게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존재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한다. 행하고 있을 것이다. 죄를 저지른 목사가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했다며 다시 목자임을 자처하는 일이 빈번하고 또한 자연스럽다. 로마서 8장 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리라.” 이 구절은 누구를 위한 변호인가?
영화 계시록은 믿음의 근거를 찾을 수 없었던 사람이 믿음의 모습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다른 말로 믿을 수 없었던 사람이 믿기 위한 과정이 담겨 있다. 난 이 이야기의 전제가 불신이라고 생각한다. 불신은 믿지 않음을 믿는 믿음의 이면. 믿음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이름이자 오신이다. 영화 속에서 불신이 나 이외 다른 사람 모두를 의심하는 모습에서 비롯하고, 정신분열증인 아포페니아 중 변상증, 파레이돌리아가 믿음의 중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목사인 민찬이 의심하지 못하는 건 모든 게 신의 의도일 거라는 점이다. 민찬이 원하는 모습을 예시해 주는 현상과 사건들로 민찬은 신을 찬양한다. 이 믿음의 절정은 아영이 실종되고 그를 위한 기도회에서 목자인 민찬이 신명기 24장 7절을 강독하는 부분이다. 그가 신명기를 펼친 것도 우연이고, 폐건물에서 24와 7을 본 것도 우연이었다. 하지만 그는 우연을 우연이라 ‘의심‘하지 못한다. 그는 우연을 자신의 운명이라 여긴다. 이 운명은 자신의 바람을 헤아린 신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자를 죽일지니 이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민찬은 이 구절을 오신한다. 유인한자를 죽일지니. 죽일지니. 민찬과 권양래, 신아영의 구도에서 유인한 자는 매우 중의적인 의미가 되지만 민찬이 선택한 건 아영이가 천국에 있을 거라는 바람이었다. 그가 기도회를 주관하고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모습. 나는 이 모습이 우리 사회가 그들을 바라보며 떠올리는 믿음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믿음. 우린 알 수 없기 때문에 믿는다. 다시 말해 우린 아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잘못 아는 것을 지적받는다면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때론 확인하지도 않고 생각을 바꾼다. 그러나 믿음은 그럴 수 없다. 믿음은 잘못된 사실과 모습, 현상까지도 믿음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설령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고 한다고 해도, 모든 진실이 믿음의 잘못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것 또한 믿음으로 극복되기 때문이다. 선이 악이어도 믿음의 층위에선 더욱 믿음을 굳건하게 해 줄 믿음의 현현이다. 비판도 비난도 믿음을 향한 박해이며 이겨내야 할 수난이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믿음은 믿고 있는 신의 모습과 구분되지 아니한다. 믿음은 곧 신의 모습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속 믿음의 모습이 나에겐 그들이 믿는 신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것 또한 아포페니아일까? 그러나 분명한 건, 이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이, 그것만큼은 확실할 정도로 신의 속성이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감독은, 우리 인간들은 이런 이야기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