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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추문

by 아라베스크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크리스마스엔 한 남자가 있다. 추운 겨울. 전후(戰後)의 일본. 그에겐 딸이, 아내가 있었고 가난이 있었다. 그의 직업은 변호사였다.

그는 어느 날 분노를 느낀다. 스캔들을 날조한 타블로이드 잡지 아무르 때문이다. 남자는 잡지사가 없는 일을 꾸며 미모의 성악가와 신진 화가의 스캔들을 터트리고는 그걸로 큰돈을 벌어들였을 거라 생각했다. 신진 화가는 잡지사를 고소하겠다고 나섰다. 변호사는 이 추문이 세상 어느 것보다 나쁘고 더럽다고 여긴다. 변호사이기 전 한 인간으로서. 그래서 위태로워 보이는 타인, 화가를 돕고자 무작정 화가의 집을 찾아간다.


남자는 화가에게 당신은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고 말한다. 그런 질 나쁜 녀석들은 위험, 아주 위험한데 당신은 너무 진솔하고 올곧기 때문에 녀석들에게 결국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소송을 나에게 맡겨 달라. 나라면 반드시 당신을 도울 수 있을 테니.

화가는 일단 남자의 명함을 받아놓고 나중에 그가 사는 집과 일터를 방문해 보고 결정해야겠다 생각한다. 그래서 방문한 남자의 집. 집엔 남자의 딸이 병치레를 하며 방안에 누워있었다. 누워 화가를 맞이하고, 누워 웃으며 아버지의 부재와 누운 채 바라보는 마당의 아름다움을 얘기한다. 그녀와 대화한 화가는 생각한다. 이렇게 착하고 예쁜 처녀가 5년간 결핵으로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니…… 이런 딸을 보살피는 아버지라면 분명 일을 맡겨도 문제없을 것이다. 화가는 남자의 사무실로 가, 그가 없는 곳에서 칠판에 이번 일을 맡기겠다 써 놓는다.


그러나 남자는 인간이었다. 잡지사 사장에게 매수돼 화가를 속인다. 처지. 욕심. 그리고 희망. 남자는 의무를 소홀히 한다. 정의는 순간이고 욕망은 영원을 지배한다. 남자가 술에 취해 딸에게 고백한다. 나는 유약하니까 속지 않으려고 속이는 방법을 배웠다고. 남자는 돈이 필요했고, 딸을 누구보다 사랑했으며 무엇보다 함께 살아가는 지금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인간이었기에 화가를 속였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매수된 마음은 화가의 변호를 하지 말라 속삭이고 양심은 침묵한다. 딸의 위로와 용서가 그리고 딸과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거라고 여기며 괴로워한다.

“여기, 나를 위해 모두 다 함께 노래해 주세요.”


크리스마스. 남자와 화가는 술집에 앉아 대화를 나누다 어떤 남자의 고성을 듣는다. 그는 올 한 해를,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소리친다. 그리고 노래하고 싶다고, 다 같이 불러달라고 울부짖는다. 석별의 정. 이별할 때 부르는 가곡으로 그가 이별하고 싶었던 건 지나간 시간, 과거의 자기 모습이었다. 모두가 합창하는 가락으로 술에 취해 아무 말도 못했던 변호사, 남자도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여기 나를 위해서도 노래해 달라고. 나를, 버러지 같은 나를 위해서도 노래해 달라며. 지나간 시간을 잊어버릴 수 있게,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이런 나를 위해서도 제발 노래해 달라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크리스마스는 모두가 함께 노래를 부르며 끝이 난다. 크리스마스가 종교적 의미와 가치를 넘어 세상 모두에게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면 이런 식의 결말 때문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적으로, 시간적으로도, 우리의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 속 남자처럼 삶의 여러 순간에서 좌절하고 괴로워하며 오늘 밤을 맞이한다. 나도 그렇다. 아마 그럴 수 없는 인간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일 년 중 하루만큼은 잊을 수 있길 기도한다.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자기 희망에 어울리는 삶이 찾아올 수 있을 거라며. 병으로 누워 지내던 아름다운 소녀가 이윽고 스스로 일어나 자기 집 마당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모두에게 행운이 함께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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