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 부코
이탈리아 북부와 남부의 대비와 대립은 남부 문제란 명칭이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북부와 남부는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며 경제 규모도 다르고 발전 양상도 다르다. 일 부코는 이런 지정학적 관점을 기반으로 한 사건을 맥락화한다. 1961년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 지역에서 비부르토 굴 탐험. 영화는 서두에서 이 탐험이 이탈리아 북부가 남부를 탐험의 대상으로 삼은 첫 사례라 언급한다. 그리고 끝에 이르러 이 영화를 그들, 탐험가들에게 바친다라고 했다. 이런 기념과 헌정으로 비부르토 굴 탐험을 맥락화하는 것은 이해와 보편적 가치를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라 느껴졌다. 이해는 남부 사람들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보편적 가치는 존엄으로, 인간의 삶이 시류와 글로벌화로 형태가 좋고 나쁘고 하는 기준이 달라질 수 있지만 특정 기준으로 - 위생적, 물질적, 미감적으로 - 절대적 평가를 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존엄은 급여 수준, 물질적 풍요, 학문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생명이 살아가는 시간에 있다. 그 시간이 짧고 길든, 존재할 수 있었다는 가정부터 이미 사라져 없다는 것까지 포함하여 인간 생명이 살아가는 시간이란 개념에 존엄은 존재한다. 그래서 영화가 북부의 사람들이 남부를 탐험하러 온 것에 경의를 표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감상하며 느끼는 혼란은 이것이 극영화인지 기록 영화인지 분간이 안 된다는 점이다. 알면서도 감각은 착란한다. 정점은 목자 노인의 왼손을 - 이 장면의 충격 때문에 왼손이라는 점이 엄청난 함의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 보여주며 맥박을 보여주는 장면인데, 그야말로 그 어떤 효과보다 더 효과적으로 극적이고 가장 진실된 거짓이다. 알면서도 속는다.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감탄한다. 내겐 그 어떤 마술도 이런 감각을 안겨주지 못했다. 이게 뭔가 싶었다. 그래서 혹시 영화를 촬영하다 이분이 돌아가신 건가란 어이없는 의문까지 들었으니…
북부 최대 도시 밀라노의 피렐리 타워를 687미터 동굴과 대비시키고 탐험대의 도구를 남부 아이들의 호기심과 대비시킨다. 그리고 탐험대는 동굴의 끝, 687미터의 좁은 공간에서 더이상 길이 없음을 확인하고 과정을 기록한다. 바람은 이 기록을 날려 초원 곳곳에 흩트리고 염소들은 각 종이들을 먹어도 되는 건지 확인한다. 대부분이 극영화와 구분이 힘든 기록 영화처럼 보이지만 기록을 흩날리는 바람처럼 몇몇 초현실적 요소들이 극적 효과를 발현한다. 영화는 현실적으로 시작해 초현실적으로 끝나지만 관객은 감상의 무게를 가늠하기 힘들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가벼운 감상의 무게 때문에. 나는 결국 무의미하다 생각했다. 감성의 충만이라던가 영화적 체험이란 수사는 이 영화를 고평가 하기 위한 언어적 수법일 뿐이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이 영화에 지정학적 관점과 민족적 문제, 영성과 신비가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결국 무의미하다. 다만 이 무의미할 정도의 가벼움과 구분하기 어려운 착란, 그리고 여기 대한민국 사람의 삶과 조금도 연관이 없어 보이는 1960년대 이탈리아 남부의 삶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존엄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싶다면 그건 의미 있는 감상일 것이다. 또한 여타의 영화와 작품들과 다르다는 점은 매우 순도 높게 순수한 속임, 기만이 놀라울 정도로 충만하단 점이다. 사실 그건 영화라는 것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영화에게 부여된 속성이었고 본질이었다. 우리가 조르주 멜리어스로 알게 된 영화란 정의. 그래서 이 영화 일 부코는 매우 영화적인 영화였다. 본질적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