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숙소 두 곳을 예약해 묵었다. 첫날은 침사추이 쪽, 둘째 날과 셋째 날은 카날 로드에 있는 호텔에 있었다. 첫날. 공항에 도착해 침사추이로 택시를 잡았는데 택시 기사는 말없이 우리 짐을 싣고 우리를 태우고 30분간 운전해 쉐라톤 호텔에 내려주었다. 오래된 호텔에 짐을 풀고 바로 거리로 내려와 페닌슐라 호텔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무엇보다 감자 튀김과 케첩이 너무 맛있어 비싼 줄 알면서도 페닌슐라 레이블의 미국 와인을 한 잔 더 시켜 마셨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꿈과 환상을 생각했다. 영화 첨밀밀에서 소군은 고모의 집에 얹혀살게 되는데 매춘업소를 운영하는 그녀에게 젊을 적 할리우드 스타와 페닌슐라 호텔에서 만나 식사를 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가 한눈을 파는 사이 식당에서 사용했던 식기를 훔쳐 가지고 왔단 얘기도.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날. 가끔 그 은 식기를 보면서 그때처럼 설렌다는 고모의 이야기를 거짓으로 생각했던 소군이었지만 고모가 죽은 후 유품을 정리하면서 그 이야기가 사실임을 소군은 알게 된다. 나는 호텔 천장을 보며, 은으로 된 나이프와 포크로 샌드위치를 잘라먹으며, 와인을 마시면서, 과거에도 있었을 호텔 로비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며 환상을 꿈꿀 수밖에 없던 시대를 생각했다. 다시 있을 수 없는 걸 소망하는 삶.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둘째 날 아침을 먹으러 차찬텡으로 향하면서 건물에 둘러친 비계를 보았다. 죽붕이라 불리는 대나무 비계였다. 홍콩 건축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인 이 대나무 비계는 자격증으로 공인받은 비계 직공들에 의해 단시간에 구축되는 걸로 유명하다. 이젠 중국에서도 안전상 문제로 사용하지 않고 오직 홍콩에서만 볼 수 있다는데 실제 보니 대나무의 경량과 탄력, 친환경적 요소보다 구축된 짜임에서 오는 질감이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약 7년간 재사용이 가능하고 홍콩에선 값싼 자재라 활용도가 높다지만 높은 탄성만큼 흔들리는 불안정적 요소가 인부들에게 과연 안전할까란 생각 또한 들었다.
홍콩섬으로 건너와 전날 있었던 대륙 쪽을 바라보니 시대를 건너뛴 느낌이 왔다. 홍콩섬 쪽은 신 시가지로 첨단화된 건축물들이 일정 높이로 들어선 반면, 대륙 쪽은 공사가 한창 중인 모습과 구 건축물 신 건축물의 대비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강변 전경 이야기였고, 안으로 더 들어가 숙소가 있는 완차이 쪽에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별반 다를 게 없는 오래된 건물들이 눈에 가득했다. 이 거대하고 작게 분할된 건물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지가 쉽게 가늠되지 않았다. 생활 기반 시설은 사용 인구수에 비례해 노후화되고 파손된다. 병에 걸린 거대한 노인처럼 건물은 쓰러지기 일보직전 같았지만 인간들이 곧추세워 놓았기에 영원히 그 무게를 버티고 서있어야 하는 아틀라스처럼 보이기도 했다.
중심가 센트럴엔 랜드마크라 불리는 거대한 쇼핑센터가 여러 건물을 엮은 형태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 주변으론 고급 호텔과 호텔들의 아케이드, 그리고 은행과 기업들의 빌딩들이 도처에 산재했다. 그중 중국은행 타워는 상징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는데 이오 밍 페이가 설계한 이 건물이 날카로운 칼처럼 보여 주변 건물들은 대포 모양의 구조물을 얹혀 놓았다고 한다. 이런 상대적 개념이 내겐 홍콩과 중국의 차이를 설명하는 하나의 잣대로 보여 매우 흥미로웠다. 프루트 첸 감독이 연출한 미드나잇 애프터는 중국 속 홍콩이 홍콩인들에게 어떤 혼란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인물들은 혼란과 왜곡된 정신 상태로 텅 빈 홍콩이란 초월된 세계 속에서 새빨간 폭우를 맞게 된다. 붉게 물든 홍콩에서 인물들은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영화는 끝이 나고 후속 편을 예고하는데 아직 후속 편은 제작되지 않았다. 난 심야 버스를 타며 내가 혹시 아무도 없는 홍콩 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해 보았다. 안타깝게도 시작부터 말이 안 통해 갈등을 불러일으킬 거라 생각하며.
셋째 날엔 홍콩섬에서 멀리 떨어진 아웃렛 호라이즌 플라자에 갔었다. 코로나 이전엔 성황이었던 곳이었는데 코로나 이후 많은 점포들이 문을 닫으며 유령 건물처럼 있다 코로나가 풀리고 사람들, 외국인들이 다시 찾는 곳이라고 해서 가봤다. 홍콩섬에서 우버 택시를 타고 약 30분 만에 도착한 곳이었는데 그 건물엔 전 세계에 안 팔린 옷과 신발, 가방 등등 갖가지 물건들이 모여 자길 사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안 살 만한 물건들.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가치에 대한 혐오가 밀려왔다. 그만한 돈을 주고 살 가치가 있었던 걸까? 이것들을 샀던 사람들은 이것들을 이제와 어떻게 생각할까? 이렇게 버려진 듯 방치된 물건들을. 거액을 주고 샀을 사람들의 마음이 어딘가 불쌍하게도, 한없이 한심하게도 느껴졌다. 난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건물을 나왔다. 살 것도 없었고, 오히려 혐오가 강해져 쳐다보기도 싫었다. 지난날의 내가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마지막날 저녁엔 카우키 국수를 먹으러 갔다. 맛은 일품이었는데, 그간 아침에 먹었던 국수들이 하나같이 간이 안 된 국물로 국수를 말아줘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대체로 고명이 짜고 국수는 싱거웠던 게 그간 내가 먹은 홍콩의 국수였는데 카우키는 그렇지 않았다. 국수 맛은 완벽한 곳. 위생과 친절을 포기한다면 카우키에서 고기 국수를 먹는 건 행복이다. 고기 국수에 밀크티를 한잔 하고는 근처에 있는 제임스 서클링 와인 바를 갔는데, 거기서 마신 아르젠 피노를 지금도 잊지 못하겠다. 올해의 와인으로 선정된 네 와인 중 하나인 Chacra Pinot Noir Patagonia Treinta y Dos 2018. Treinta y Dos 는 스페인어로 32란 뜻인데 1932년 나무를 식재해 재배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란 뜻이었다. 와인 라벨엔 그해 생산된 6960병에서 6090번째라 쓰여 있었다. 이 부드러움, 적당한 탄닌과 입안 꽉 차게 퍼지는 과실과 버섯향. 인생의 많은 것을 잊게 하는 훌륭한 맛에 나는 감탄했다. 제임스 서클링은 피노누아의 재정의, 경이롭단 표현으로 이 와인에 100점을 주며 올해의 와인으로 선정했는데, 나도 동의했다. 2023년에 나는 이 와인을 마신 걸로 2023년을 잊을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행복한 마음으로.
여행의 어느 밤. 버스를 타며 나는 홍콩섬의 바깥을 돌아 숙소로 돌아갔었다. 내려, 혼자 걸어 숙소로 발길을 옮기면서 지금 이 시기, 이 나이가 되어 홍콩을 처음 여행한 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건물, 발렌시아가 옷과 신발로 온몸을 치장한 채 생선을 토막 내는 가게 주인, 구걸하지도 않는 거지들과 한심할 정도로 맛이 없는 국수. 하늘을 찌르는 건물과 하늘을 물들게 한 화려한 네온사인들, 내가 알 수 없는 말로 소리치며 좋아하는 사람들. 이상하게도 싫었던 것들이 이상하게도 좋았던 곳. 그곳은 방콕과 다른 의미로 혼돈된 도시였지만 방콕과 다르게 혼돈이 조화된 묘한 도시였다. 오래전 봤던 아비정전의 끝. 어떤 마음일까, 불을 끄고 집을 나선 주모운의 마음은. 왠지 나는 홍콩이 그때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아프지만 행복한 모순된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