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온다와 원작 소설 온다의 사이
영화가 원작과 다르게 나아가는 방향엔 의도가 있다. 영화가 마지막 결전을 승패로 구분 짓지 않고 세 명의 인물이 – 노자키 마코토 치사 - 그 싸움 이전과 다르게 크리스마스를 맞는 것에서 나는 행복을 보았다. 원작에서 결전은 확실한 승자가 있고 인물과 독자는 끝에 이르러 봄이 시작되는 계절을 맞는다. 원작은 그러한 싸움은 끝이 날 수 없음을 암시하고 그것의 전조를 인물들은 – 노자키, 마코토, 카나 등은 – 모르게, 하지만 독자는 알 수 있게 끝이 난다. 이 두 차이점은 관객과 독자, 즉 작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어떠한 감정을 전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나는 원작이 모든 것이 회복되고 나서도 그 안에 내재한 불안 요소가 두려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고, 영화는 어찌 되었건 고통을 벗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아름다운 크리스마스가 그렇듯이 행복이란 이런 순간에도 찾아올 수 있음을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다테마에建前와 혼네本音에 집중한다. 원작이 부부 생활과 가족이란 테두리에서 일어나는 불안과 폭력을 보기왕이란 요괴로 은유하는 것과 구분된다. 영화에서 다하라 히데키 가족의 비극은 다하라 히데키가 거짓말쟁이기 때문이라는 명백한 죄에서 출발하는데 이는 배우자인 카나 앞에서 말과 다르게 행동하는 점, 어쨌거나 자기가 카나와 결혼을 해주었다는 속마음을 들키는 것에서 관객은 그 죄의 실상을 알게 된다. 영화에서 거짓은 매우 중요한 인과로 각인되는 것이다. 하지만 원작은 거짓에 대한 언급이 없다. 위선과 폭력이 대를 이어 내려왔고, 누군가의 저주로 인해 보기왕이 치사까지 노리게 된 것으로 이해를 시킨다. 영화에서 다하라 히데키가 직장 동료와 불륜 관계였다고 암시는 되나 실제 확인되지 않은 반면, 원작에선 가라쿠사 (친구인 민속학 교수. 영화에선 쓰다로 나온다. 참고로 쓰다는 원작에서 이웃한 고즈에란 인물의 남편 이름으로 잠깐 언급된다) 증언으로 그런 불륜이 확실하게 되는 것도 상반되는 맥락의 차이에 있지 않았나 싶다.
세 번째이고 가장 확연히 구분되는 점은 제목이다. 영화는 온다(来る)이고 원작은 보기왕이 온다(ぼぎわんが、来る)이다. 적이 되는 요괴 혹은 귀신의 이름을 영화에서 ‘그것’이라고 모호하게 지칭하는 반면 원작은 다하라 히데키의 할머니가 보기왕이란 이름을 떠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기원까지 찾고, 그것으로 원인까지 알아낸다. 소설 속 보기왕의 묘사는 사다코와 비슷한 면이 있지만 얼굴이 묘사된다는 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처럼 느껴진다. 그 얼굴이란 것이 보기왕이 살인을 일으키는 동인을 함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에서 ‘그것’은 명확한 형태가 없고 힘을 일으키는 원인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힘은 무차별적인 살인과 폴터 가이스트 현상으로 불안과 공포를 자아낸다. 이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더 큰 공포를 일으킨다는 것을 가시화한 것이다. 해석할 수 없는 것, 말로 규명할 수 없는 것에 사람은 불가지론적인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또한 그건 인간이 결국엔 유약할 수밖에 없음을 증명한다.
영화와 원작은 내가 언급한 것보다 훨씬 많은 차이가 있고, 거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관점들이 독자와 관객에게 그것들 각각의 의미를 찾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독자와 관객이 그러한 많은 차이를 규합하는 것에 한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고 본다. 선과 악이 분명한 원작과 선과 악이 어느 선에서부터 구분되지 않는 영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을 때 오직 고통만이 분명한 지표가 될 거라는 영화에서의 세츠코가 한 말은 원작과 영화가 각기 달리 전달하는 것의 근원임을 노자키처럼 우린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고통만큼 분명한 것은 없다. 우리는 두 작품의 고통에서 출발해 결국 하나의 고통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합목적성이 있음을 강하게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