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선물
공유와 연결이 예견되는 시대였지만 과거 어느 때와 같이 개인이 차폐된 시대였다. 90년대 중후반을 살아가는 학생들은 교과서와 공상소설, 과학이 상상하는 미래를 꿈처럼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의 이음동의어였고 발전과 꿈, 미래는 상상이란 틀에 가둔 허상이었다. 아마도 똑같을 거라고, 앞으로를 예상하는 시제로 지금이란 현실을 묘사하곤 했다.
우리를 둘러싼 빛은 우리 눈에 어둠을 드리웠다.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우린 어둠 속에 서 있다가 찬란한 빛을 향해 고개를 드는 바람에 조금도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되었다. 플라톤이 말한 눈이 보이지 않는 두 가지 경우 중 하나. 어둠 속에 있다 지나치게 밝은 빛을 봐서 앞을 못 보는 상태. 에반게리온이 보이게 된 때였다.
결국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 진정한 에반게리온의 결말이었음을 모두가 알게 되는 시대가 되었다. 난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많은 걸 알 수가 없는 사람이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으며, 결국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난해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에반게리온 태동 이후 에반게리온을 수식하는 단어 난해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이다. 이 사람은 지나치게 똑똑하거나 현자처럼 이해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밝은 빛에서 나와 어두운 동굴로 되돌아가려는 사람일 뿐이다. 방금 전 그 동굴에서 벗어나려고 빛으로 나왔음에도. 그래서 빛 속에서 앞이 보이는 사람은 이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에반게리온을. 에반게리온은 정서로 감각하는 이야기고, 이야기 속 설정과 배경은 눈부신 빛과 같은 제도를 모델화한 동기일 뿐이다. 에반게리온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 감정은 분노. 90년대를 살아간 사람이 에반게리온을 보고 감명받았다면 그건 오로지 분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젠 조절장애까지 온 오늘날의 분노는 병일뿐인데 그때는 신성했다. 거기엔 무지했으나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함, 자기 파괴적인 모순까지 함의되었기에. 초호기의 태동에서 2호기가 양산형 에바에게 난도질당하는 결말까지 분노는 해소를 목적으로 삼는다. 모든 걸 파괴하고, 그 자신마저도 찢기는 걸로.
나는 에반게리온이 분노란 감정을 품고 있기에 진정한 신의 선물이라 여긴다. 하지만 미래는 그것마저도 병으로 규정한다. 이것이 현실인 것이다. 에반게리온은 영원히, 동굴로 돌아가는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게 우릴 한때 자유롭게 했던 사람의 운명이다. 우린 분노 속에서 모든 게 가능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젠 그것을 감추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길들여진 인간이 되어, 어른이 되었다는 의미로써. 운명과 결말이 예견되는 한 명의 인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