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릿광대의 두상 II
더럽지만 순수하고 나이 든 어리숙함이 보였다. 빠진 이, 모인 눈, 벌어진 콧구멍과 더러운 얼굴 표면의 제스처와 색은 파스텔 연필로 표현한 배경의 연두 녹색, 광대가 입고 있는 옷의 노란색과 대비되면서도 어울려 사의의 본질을 표현한다. 나는 이 그림이 삶을 오래 살았던 사람이 거울을 보듯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오래 살아온 삶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다고도. 아기가 자라면 어린아이가 되고 청년이 되고 성인이 되지만 아이인 청년, 아이인 성인, 아이인 노인이 되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다만 거울은 깨달음의 방편이기도 하지만 착각의 도구이기도 하니. 그래서 내가 느끼는 그림 이상의 무언가가 그림에서 표현되는 것을 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내 착각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 감각과 이해, 이젠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림의 사의 모두 다 허상일지라도 그림을 보고 난 후의 관념은 사라지지 않고 잊히지가 않는다. 매우 현실적이기에. 비현실적 그림을 보고 난 후에 그것이 매우 현실적이라 잊히지가 않는다고 말하는 나는 정상인가? 비논리와 모순이 야기하는 혼란. 예술이 가진 여러 면 중 하나를 나는 그렇게 묘사한다. 오래전 어두운 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완벽한 연인들을 보며 느낀 감상이다. 하나가 될 수 없는 마음과 하나란 행복과 둘이란 완벽한 연인들을 보고 난 후에.
나는 피카소가 어릿광대로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그렸다고 여긴다. 오래될수록 슬프고 우스워지는 것을. 좋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을. 살아가는 모습이란 건 그런 것이다.